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Oct 13. 2022

한두 계절 묵힐 책

단상(72)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를 때면 늘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프랑스어 외서 코너로 향한다. 원서야 요즘은 개인이 직접 해외 직구 등을 통해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고 배송 기간도 길게는 한 달은 걸려서 서점 보유 재고로 양서가 채워진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그야말로 보물섬 같은 곳이다. 특히나 영어가 아닌 불어 원서를 만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으니까.


볼일이 있어 근처에 나온 이날, 겸사겸사 오랜만에 광화문점에 들렀다. 과연 어떤 책들이 채워져 있을지, 약간의 설렘 혹은 기대를 품고. 서점 재고를 폰으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지점에 무슨 책이 구비되어 있는지 모른다니, 기계치를 넘어선 디지털'치'임을 너무 티 내는 게 아닌가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외서가 켜켜이 쌓여 있는 건 어마어마한 장점 이면에 살포시 숨어 있는 단점 한 가지가 있는데, 프랑스어 외서의 경우 실시간 재고 조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둥!)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사고 싶은 원서가 생겨서 가도 없을 때가 있고, 시간이 붕 떠서 잠깐 들렀다가 두세 권이나 '득템'했던 때가 있기도 했다. 한 번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 원서가 있어서 사려다가 그날 짐이 너무 많아 며칠 뒤에 들러서 사기로 했는데, 그 며칠 사이 재고가 동나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간 적도 있다. (프랑스어 원서는 보유 재고가 많아야 두 권이다. 예외적으로 딱 한 번, 코로나가 유행 초기에 베스트셀러로 재등극한 카뮈의 <페스트>가 수북이 쌓여 있던 적도 있긴 있었다.) 그 이후로 광화문점에 갈 땐 왠지 모르게 보물찾기 하는 마음으로 가게 되었다.


이날은 다행히 보물을 두 권이나 발굴했다. 카뮈의 <Noces suivi de L'été>(결혼, 여름)과 실뱅 테송의 <La panthère des neiges>(눈표범). 사고 보니 계절성이 짙게 드러나는 에세이였다. 전자엔 알제리에서 보낸 뜨거운 여름이, 후자엔 눈표범을 찾아 티베트의 설산에서 보낸 겨울이 담겨 있다. 계절의 분위기나 감성에 딱 맞는 책을 그 계절에 읽으면 여운이 훨씬 짙게 남는다는 걸 잘 알기에 이 두 책은 잠시 묵혀 두기로 했다. 우선 티베트의 겨울 이야기는 곧 다가올 겨울에 읽기로 했다. 영하 10도까지 기온이 뚝 떨어지는 한 겨울에 읽으면 어느 히말라야 설산 속에 있다는 기분이 들 것만도 같다. 알제리의 여름 이야기는 두 계절을 더 보낸 후 내년 여름에 읽기로 했는데,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은 열대야에 선풍기 앞에 떡하니 자리 잡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올 계절을 위해 책을 묵힌다고 그럴싸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일종의 변명이기도 하다. 바로 읽지 않고 나중에 읽으려는 변명. 원서는 아무래도 읽는 데 더 오래 걸리고 제대로 이해하며 읽으려면 더 많은 품을 들여야 해서 구입 당시의 당찬 포부와는 달리 막상 읽으려고 하면 굳은 결의 같은 게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아무튼, 책을 묵혀 둘 그럴듯한 변명을 마련했으니 한두 계절 쯤은 책장에 고이 모셔두기로...


말이 나온 김에 푹푹 찌는 여름의 권태로움이 잔뜩 서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과 대관령에 겹겹이 쌓인 눈의 하얗고 차가운 정서가 이야기를 떠받치는 이순원의 <삿포로의 연인>, 여름과 겨울에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추천해 드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