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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ON FAVORI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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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an 31. 2021

걷다가 마주친, 리옹

프랑스 네 도시 이야기, 몽파보리(4-4)






    수도 시설이 없던 4세기, 물을 길어 올 강까지 지름길을 낸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리옹의 트라불(Traboule). 건물에 막힌 길 때문에 강까지 에둘러 가지 않도록 건물 사이사이에 길을 뚫어 낸 통로이기도 하다. 물과 물자가 오가던 트라불 위로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 주위로 사진 속 건물이 층층이 쌓여 남았다. 앞뒤를 훤히 뚫어 길을 텄던 옛날의 트라불과 달리 지금은 트라불 주변에 세워진 많은 건물이 사유화되어 입구를 제외한 통로에 단단한 빗장을 채워놓고 있다.

      

    건물 사이로 낸 좁은 길을 수직으로 솟은 건물이 에워싼 형태의 트라불은 남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리옹의 레지스탕스 단원들은 나치의 눈길이 닿지 않는 트라불을 은신처로 삼았다. 숨어든 레지스탕스 단원은 하얀 나비 꽃의 기운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며 훠이훠이 달아났을 것이다. 중세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하얀 나비 꽃 기운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섬유 산업이 번창했던 중세 리옹의 많은 봉제 작업장은 트라불 안에 ‘갇혀’ 있었다. 귀족 계급의 지위를 갖지 못한 봉제 노동자는 강제로 작업장에 꽁꽁 숨겨진 채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   

   

 

    70~80년대 우리나라 공장 노동자의 모습이, 생경하지만 트라불 위에 겹쳤고 그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 '사계'가 떠올랐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워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하얀 나비 꽃으로 남았을 봉제 노동자의 애환이 트라불에 서려 지켜주지 못한 노동자의 삶 대신 레지스탕스 단원의 목숨을 지켜준 건 아닐까.


    가장 트라불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쿠르 데 보라스(Cour des voraces)'를 보러 갔을 때 머릿속에 그려진 장면이다. 건물이 있는 지역 명칭이 하필 붉은 십자가란 뜻의 'Croix-rousse'여서 이런 서사가 제멋대로 얽히고설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만히 트라불의 미로 같은 형태를 보고 있자니 알게 모르게 리옹 구시가시에서 트라불을 자주 맞닥뜨렸다는 걸 퍼뜩 깨달았다. 정확히 하나의 구조만을 트라불로 지칭하는 건 아니란다. 골목을 다니며 숱하게 스친 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던 것도 트라불이었던 것이다. 골목 여행의 묘미를 이렇게 또 하나 알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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