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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와 목민심서

겨울 저녁 시골교회 이야기

by 강석효

겨울은 참 사람을 따뜻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추위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난로의 고마움을 알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도 느낄 수 있으니까.


딸아이가 어느 날 서재로 성큼 들어왔다.
"아빠, 나랑 숙제 같이 해요."
이 말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세상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은 일곱 살 인생이지만, 아빠랑 뭔가를 '같이' 하겠다는 그 말 하나에 마음이 말랑해진다.


숙제는 단순했다.
‘겨울철 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세요.’
그 말에 우리는 책상 위에 달력을 뒤집어 펼쳐 놓고, 그 뒷면을 가득 메웠다.
흰 눈, 썰매, 눈사람, 성탄절, 아기 예수님, 군밤... 그리고 고구마.

‘군고구마’란 네 글자가 연필 끝에서 툭 튀어나오자, 딸아이는 반짝 눈을 뜨고 말했다.
“아빠, 우리 고구마 구워 먹어요!”


그래서 우리는 고구마를 호일에 싸서 교회 난로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교회 난로는 새로 들여온 것이어서 아직 사람 손때가 덜 탔지만, 그 위에서 익어가는 고구마 냄새만큼은 정이 철철 흘렀다.


저녁예배가 끝날 무렵, 교회당 안은 구수한 고구마 향으로 가득 찼다.
그 냄새를 맡고 사람들이 하나둘 난로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예배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뿔뿔이 흩어졌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마치 어릴 적 동네 어귀에서 불 피워 군고구마 나눠 먹던 아이들처럼, 다들 난로 앞에서 웃고, 이야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마가 다 익자, 아내는 종종걸음으로 교인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손에 쥐고, 살며시 반으로 갈라 보았다.
노오랗게 익은 속살이 김을 폴폴 피우며 얼굴을 반긴다.
한입 베어무니, 입안 가득 퍼지는 달큰함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따끈한 보리차 한 모금과 함께 삼키니, 그건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그건 마치, 잊고 지낸 사람 냄새였고, 오래된 시골집 부엌의 온기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조용히 피어나는 신뢰 같은 것이었다.


그날의 예배는 민수기를 강해하던 날이었다.
창세기부터 시작한 성경 통독 설교가 어느덧 민수기에 이르렀다.
3년이면 성경 한 권 전체를 설교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뿌듯했고,

성도들은 이런 긴 여정에 동참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한 젊은 집사님이 웃으며 물었다.
“목사님, 성경 다 끝나면요? 그 다음엔요?”
나는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럼 다시 창세기부터 시작해야지요.”
그 말에 교회가 떠나갈 듯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잦아든 그 틈에, 나는 짧은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에서 따온 이야기였다.
칙궁(飭窮), 그러니까 백성을 다스리는 이가 정신을 고요히 모아 선한 방책을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인용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두 말씀이 공명처럼 겹쳐 울렸다.
하나는 옛 선비의 다짐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둘 다,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것이다.
마음의 고요함에서 시작된 선한 뜻, 그 뜻을 실천하려는 꾸준한 마음.
나는 그것이 진정한 목회자의 삶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곁에 앉은 평범한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라 믿었다.
틈이 있거든 고요히 생각하고, 그 고요함 속에서 선을 도모하는 삶.
고구마 한 알과 보리차 한 잔이 사람의 마음을 모으고, 말씀 한 구절이 그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야기가 끝나자 한 성도가 말했다.
“목사님, 앞으로 주일 저녁마다 예배 끝나고 이렇게 고구마랑 목민심서 이야기 연재 좀 해주이소.”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고구마 냄새만 맡아도 칙궁 이야기를 떠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래도 괜찮다.
고구마 굽는 냄새 속에서 사람을 생각하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 선을 도모하는 마음 하나 품는다면,
그 고구마는 이미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다.


겨울 저녁, 작은 시골 교회 난로 위에서 구워낸 고구마 한 알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웃게 하고, 다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싶다.


그러고 보니,
삶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가만한 틈에 정신을 모으고, 그 고요함 속에서 이웃을 위한 선을 도모하며,
매 순간 따뜻함을 나누는 일.
그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뜻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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