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속 살아가는 이야기
아침부터 바람이 매서웠다. 4월이라지만, 꼭 초겨울의 자락이 마지막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차갑게 불었다. 이른 아침부터 앞머리카락을 흩뜨리고, 목덜미를 후벼파는 그 바람을 맞으며 마당에 섰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듯 무거웠다.
그런 날엔 이상하게도 잡초가 더 눈에 잘 띈다. 겨우내 움츠렸던 땅이 조금씩 제 얼굴을 펴는 계절이지만, 맨 먼저 성급히 올라오는 것은 잡초들이다. 생명력이라는 게 꼭 반듯하고 고운 것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듯, 거침없고 거칠고, 때로는 뻔뻔하게 자라나는 것들이 마당을 장악한다. 그래도 묘하게 미워지진 않는다. 무릎을 꿇고 하나하나 뽑다 보면, 어쩐지 내가 조금은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마당 한쪽엔 수선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하얀색 꽃잎을 넓게 펼친 그 수선화는, 햇살보다 먼저 내 마음을 환하게 했다. 그 곁에는 키 작은 보라빛 튤립도 몇 송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수선화는 그 하얀 얼굴을 온 힘을 다해 펼쳐 보이고 있었고, 튤립은 얌전하게 제 존재를 드러냈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봐주길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스노우화이트 꽃은 말 그대로 눈이 내린 듯 피어 있었다. 하얀 그 꽃잎들이 모여 마치 이른 아침의 서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 없이 흩날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작년에 가지를 많이 쳐버린 분꽃은 단 한 송이만 피었다. 그런데도 그 한 송이가 마치 여백 속의 점 하나처럼, 그 자리를 채우기에 충분해 보였다. 많고 화려한 것보다, 간절히 기다린 한 송이가 더 눈물겹게 예뻤다.
이따금 부엌 쪽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아침겸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멀리서도 된장국 끓는 냄새가 퍼져왔다. 두부가 푹 잠긴 국물에 당근, 애호박, 양파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이 집에서 된장국은 언제나 제 몫을 다한다. 짭쪼름하고 구수한 그 국물이면, 마음속 어떤 허기까지도 말끔히 씻긴다.
잠시 후 아내는 소고기를 고추장에 볶고 있었다. 고기 익는 냄새와 고추장의 매콤한 향이 합쳐져, 부엌은 물론 거실까지 바삭하게 구워졌다. 이윽고, 아내가 밥을 푸고는 방금 볶은 고기를 얹었다. 당근, 애호박, 양파가 고루 섞여 들어간 그 비빔은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밥 위로 된장국 한 숟갈 끼얹고, 잘 비벼진 고기볶음을 얹어 한 입 가득 떠넣었다. 아, 이 맛이란. 세상에 그 무엇도 이 맛 하나를 대신하지 못한다. 손끝으로 다듬고 마음으로 지은 밥이,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사람들은 종종 행복을 어디선가 먼 곳에서 찾으려 애쓴다. 멋진 경치, 근사한 식당, 값비싼 음식, 화려한 말들. 하지만 내게 오늘 아침의 행복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 무릎 꿇고 뽑은 잡초 몇 뿌리, 그 틈에서 피어난 수선화와 튤립, 부엌에서 묵묵히 움직이는 아내의 등, 그리고 그 손에서 나온 비빔밥 한 그릇이면 충분하다.
입안에 한참을 넣고 씹으며 생각했다. 이게 바로 사는 맛이지. 누가 뭐래도, 지금 이 순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다.
바람은 여전히 차고, 하늘은 잿빛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배부르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은 바람대로 불게 하고, 나는 내 밥상을 지켜가면 된다. 그 안엔 이미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