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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선 Dec 30. 2020

우리가 세비야 경찰서에 간 이유

모든 것이 너무나 좋았던 날



어쩐지 아침부터 기분이 너무 좋더라니...

          

경찰서를 찾아가다.

세비야 여행 이틀째 늦은 오후, 경찰서는 관광지가 모여있는 중심지가 아닌 꽤 외곽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현대식으로 지어진 경찰서에 들어갔다. 유럽 경찰서는 처음이라 좀 무섭기도 해서 쭈뼛거리며 입구로 들어서니 현지 경찰관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 영어를 못 하는지 딸이 폰을 가리키며 사정을 설명하려고 하자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잉글리시?라고 물어보았다. 딸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를 옆에 있는 대기실로 데려가 기다리라고 한다. 대기실에는 이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어서 한참 기다려야 하나 싶었는데 좀 있으니까 우리를 불러 안쪽 작은 사무실로 데려갔다.


Comisaria de Policia

사무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두 개 있고 책상 위에 전화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경찰관은 딸에게 전화를 받아보라고 하고는 우리만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상대방은 영어 통역 담당인 것 같았다. 딸이 뭐라고 조금 대화하더니 나에게 물어본다.


엄마, 어디서 잃어버렸냐는데...

응, 알카사르 옆 공원에서... 갑자기 물어보니 당황스러웠다.

몇 시에? 낮 12시... 

보험 회사는 어딘지... 글쎄...ㅇㅇ보험? 별걸 다 물어본다.

기종은 뭐지? LG ㅇㅇ폰.

폰 가격은 얼마냐? 한 30만 원 정도였나? 잘 모르겠어.

2년도 지나서 잘 기억이 안 났다. 알고 보니 50만 원대였다.

달러나 유로로 얼마야? 그냥 3만 달러라고 해.

당황하니 간단한 계산도 잘 안된다. 말하고 나서 헉 싶었다. 1 달러당 천 원씩 계산해도... 3천만 원짜리 이라니!

유로로 다시 말해달라는데... 아차! 300 유로라고 말해줘.

순식간에 100배나 싸졌다. 상대방도 당황했겠지.

어째 이상하다 싶었대. ㅋㅋ


둘이서 겨우 통화를 마치자 다시 경찰관이 옆 사무실로 가서 영어와 스페인어로 된 폴리스 리포트 두 장을 출력해 주었고 그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그랬다. 나는 휴대폰을 잃어버렸고 도난 신고를 하고 폴리스 리포트를 받으러 경찰서를 찾아온 길이었다. 14년 동안 여러 번의 유럽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사건 사고가 없었는데... 

영어 회화가 가능한 딸도 마주 보고 표정이나 손짓을 하며 대화하는 것과 달리 전화로 얘기하는 데다 사건 설명을 해야 하다 보니 긴장이 되고 많이 힘이 들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으러 가야 했지만 하루 종일 너무 지쳐버린 우리 둘은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딸... 엄마가 미안해. ㅠㅠ




새벽 일찍 일어나 언제나처럼 산책을 나갔다. 구글 맵으로 길을 확인하면서 20분 정도 걸어 스페인 광장으로 다. 하늘은 흐리고 이슬비가 미스트처럼 흩뿌리는 날씨였다. 어... 비가 오면 안 되는데... 싶은데도 안개가 자욱하게 낀 스페인 광장은 몽환적인 분위기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갔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서 세비야 대성당 쪽 길을 따라 호텔로 돌아왔다. 산책 길에 본 신비한 새벽 풍경 사진과 느낌을 카톡으로 남편에게 보냈었는데 그 사진 두 장이 내 폰의 마지막 사진일 줄이야...


안개 속 스페인 광장의 새벽 풍경
세비야 대성당 근처 새벽 풍경


조식을 먹고 딸과 본격적으로 세비야 여행을 시작했다. 오전에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근처 공원과 강변, 그리고 스페인 광장까지 가볼 예정이었다. 오후 두 시 세비야 대성당 입장을 예약해 두었고 저녁 식사 후엔 스페인 광장 야경을 볼 생각이다. 하루를 알차게 관광할 생각에 발걸음도 가볍게 길을 나섰다. 새벽에 우려했던 것과 달리 날씨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스페인 광장 가는 길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여권을 맡기고 자전거를 두 대 빌렸다. 두 시간 대여에 1인, 8 유로 (약 10,000원)였고 골라 주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두 시간 이내에 돌아오면 된다. 대여점 앞에서 자전거 안장 높이를 맞추고 있을 때 견학이라도 가는지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 수십 명이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짹짹거리는 병아리 같아 보여 귀엽게 보고 마는데 몇몇 여학생이 우리를 보고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혹시 동양인이라고 인종 차별하는 말이라도 할까 긴장이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 여학생이 우리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응? 우리가 뭘 들은 거지? 너무 또렷한 발음으로 한국어 인사를 들은 우리는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고 아이들은 서로 까르르 웃으며 뭐라 뭐라 수다를 떨며 지나쳤다. 잘은 모르지만 "봐 한국인 맞잖아." 이러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바로 한류의 힘인가? 아니면 BTS? ㅋㅋ



왠지 모를 뿌듯함을 갖고 자전거를 끌고 공원으로 향했다. 날씨와 기분이 모두 정말 끝내준다!


중학교 졸업한 후로 35년 만에 처음 타보는 자전거는 생각보다 무섭고 잘 타지지 않았다. 딸도 역시 오랜만에 타는 거라는 제법 잘 타고 간다. 나는 과달키비르 강변까지 가는 동안 타고 시간보다 자전거를 끌고 걸어간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강가에서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니 자전거와 씨름하며 지나 온 거리마저 한없이 예뻐 보인다. 괜히 자전거 앞에서 폼을 잡고 사진도 찍어 보고 강가의 풍경도 감상하고는 이제 스페인 광장 쪽으로 자전거를 돌렸다. 그래도 연습이 되었는지 아까보다 타는 게 수월해졌다.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만 이마로 불어오는 맞바람이 익숙할 정도로 달려보기도 한다.


스패안 광장
직접 만든 여행 토퍼

새벽에는 안개 때문에 제대로 못 봤던 스페인 광장이 자신의 매력을 잔뜩 내세우며 자리 잡고 있다. 눈에 보이는 광장의 모습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어디서 찍어도 인생 샷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이 모든 것이 예쁘다. 자전거를 세워 두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늘 아래서는 길거리 공연하는 플라멩코 무희의 모습도 보인다. 이래서 세비야에 오면 꼭 스페인 광장을 봐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덧 자전거 반납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이제는 자전거를 끌지 않고 타고서 대여점 쪽으로 갔다. 알카사르 옆 무리요 공원을 가로질러 쭉 뻗은 길이라 나란히 가지 않고 따로따로 운전을 해서 갔다. 가다가 예쁜 풍경을 보면 사진도 찍고 단톡 방에 글을 쓰기도 하며 쉬엄쉬엄 가고 있었는데 먼저 가던 딸이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이제 몇 시나 되었을까 하면서 크로스백에서 폰을 꺼내려고 했는데...


헐... 폰이 어디로 간 거지? 도대체 왜 가방 안에 폰이 없지?

좀 전에 공원 입구에서 카톡도 보내고 했는데...

딸이 놀란 표정으로 오더니 무슨 일인지 물어본다. 

엄마 폰이 없어졌어. ㅠㅠ

어쩌다가? 소매치기야?

몰라. 자전거에 신경 쓰다가 떨어뜨렸는지 누가 훔쳐 갔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 

여러 사람들과 지나쳐 갔지만 부딪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혹시 몰라 크로스백과 호주머니를 다 뒤져봐도 역시 없다.


일단 자전거를 반납하고 둘이서 공원을 샅샅이 뒤져보지만 만약 떨어뜨렸다 하더라도 악명 높은 스페인에서 제자리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우선 폰케이스에 꽂아둔 체크카드는 한국에 있는 작은 딸에게 부탁해 취소를 했고 엄마 메일 확인해서 항공사에서 메일 오면 연락 달라고도 부탁해 두었다. 폰은 약정 기간이 지나 교체할까 하다가 고장도 안 났는데 무슨... 하며 갖고 왔던 거라 괜찮다고 애써 위로했다.


하지만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 예약 바우처, 구글 맵, 번역 앱, 일정 관리 메모 등 여행 관련 정보들이 싹 다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당장 오후에 갈 세비야 대성당 오디오 가이드 앱도 내 폰에 있어서 정보도 없이 관광을 해야 한다. 혹시 몰라 호텔이나 투어 예약 바우처를 한 부씩 출력해와서 그나마 다행이다. 자유여행을 하는 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휴대폰에 의지하고 있었는지 실감이 났다. 14년 전에는 폰도 없이 가이드북 하나 들고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없어서 배 고픈 줄도 몰랐는데 벌써 한 시가 훌쩍 넘어 세비야 대성당 예약 시간이 다되어 간다. 입맛은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는 고팠다. 근처에서 대충 점심을 먹고 세비야 대성당을 보러 갔다. 오디오 가이드도 없고 제대로 집중도 안돼서 성당 내부를 대충 보다가 그중에 눈에 익은 콜럼버스 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는 내부 관람을 마쳤다.


세비야 대성당 (출처: pixabay.com)
세비야 대성당 내부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세비야 대성당 Sevilla Cathedral

아랍 왕조가 패해 북아프리카로 쫓겨난 뒤 이슬람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성당이다. 성당 내부에서 이어진 문으로 나가면 오렌지 나무가 늘어선 정원이 있었고 옆으로 히랄다 탑으로 오르는 통로가 보인다. 그 와중에도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은 아랍 양식의 탑, 히랄다 탑에 올랐다. 탑은 그대로 두고 이슬람식의 돔 모양 지붕만 고딕 양식의 첨탑으로 바꿨다. 계단이 아닌 비스듬한 오르막길로 되어 있는데 당시 말을 타고 탑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내내 마음이 어지럽고 자책이 되었다. 조금 더 조심할걸... 자전거를 타지 말걸... 옆에서 딸이 엄마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 준다. 하지만 딸과 함께 하는 여행을 망친 것 같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꼭대기에 오르니 세비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여전히 답답하기만 하다. 

저기 어딘가 내 휴대폰이 있겠지...


히랄다 탑에서 내려다본 풍경


대성당을 대충 보고 나와서는 근처의 휴대폰 판매점을 찾아 공기계와 유심칩을 구입했다. 아직 일정이 8일이나 남아 있으니 임시방편으로 써야 할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딸은 세비야 시내에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검색해보고는 나를 데리고 찾아갔다. 참고로 경찰에 신고할 때 분실했다고 하면 폴리스 리포트를 발급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잘 모르겠어도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해야 여행자 보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여러 번의 여행을 하면서 다행히 한 번도 큰 사건 사고가 없어서  여행자 보험을 들어야 하는지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혹시 사람 일이란  어찌 될지 모르니 가장 기본적인 보험 상품에 가입하고 여행을 왔다. 이번 경험을 통해 반드시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고 여행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 같이 동행하는 여행 메이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에는 의견도 별로 얘기하지 않고 내가 이끄는 대로 여행을 하던 딸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너무 든든하게 느껴진다. 만약 '좀 조심하지 그랬냐'며 짜증이라도 냈다면 얼마나 서운했을까? 당황한 엄마를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딸이 정말 고마웠다.





경찰서에서 일을 마무리한 우리는 다른데 들르지도 않고 호텔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버린 하루였다. 저녁은 호텔 객실에서 접이식 포트에 라면을 끓여 한국에서 가지고 간 소주와 함께 먹기로 했다. 오랜만에 라면에 소주 한 잔을 마시니 그나마 기분이 풀린다.


역시 지치고 힘들 땐 소주가 최고다. 계속 풀 죽어 있을 수는 없지. 그래...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될 다음 포르투갈 여행은 더 조심하며 끝까지 즐겁게 잘해보자! 다짐해본. 새벽 이슬비를 맞으며 시작했던 길었던 하루가 어느새 밤...  이슬을 마시며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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