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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선 Jan 22. 2021

대항해 시대의 영광, 벨렝 지구

리스본 여행 두 번째 날 (2)


벨렝 지구로 가는 15 트램은 종점인 피게이라 광장을 출발해 천천히 레일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 코메르시우 광장 앞을 거쳐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트램은 왼쪽으로 보이는 테주 강을 따라 고작 7km 남짓 떨어진 거리를 30분이나 가까이 달려 벨렝 지구로 갔다. 느리게 움직이는 트램에 앉아 햇빛에 반짝이는 테주 바라보다 보니 바쁘게 산다는 건 그리 중요치 않게 느껴진다. 계획했던 일정이  밀렸지만 어차피 늦어버린 터라 더 급할 것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도, 의미 없이 멍하니 보내는 시간도 여행이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파스테이스 드 벨렝 Pasteis de Belem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아니라  옆에 있는 파스테이스 드 벨렝이었다. 오전 내내 병원에서 시간을 보낸 덕분에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파스테이스 드 벨렝

리스본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인 나타 (Nata)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수녀복을 다릴 때 달걀흰자만 사용해 쓰고 남은 노른자를 이용해 수녀들이 만든 음식이라고 전해진다. 파스테이스 드 벨렝은 수도원에서 비법을 전수받아 1873년 문을 열었고 리스본 나타의 원조 맛집이다. 듣기로는 항상 많은 손님들로 북적인다는데 비수기라 그런지 줄을 서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가게 바깥까지 있는 은 포장 주문하는 사람들이라 가게 안에서 먹기로 한 우리는 안쪽 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갔다.



입구는 좁아도 가게 안쪽 공간은 예상외로 상당히 넓었다. 테이블에 앉아 좀 기다리니 주문했던 나타와 커피가 나왔다. 어제 다른 나타를 먹어봤지만 원조의 맛은 어떨지 궁금했다. 금방 구워져 나와서 따뜻하고 바삭한 페스트리 안에 약간 탄 것처럼 드문 드문 갈색이 보이는 노오란 커스터드 크림이 담겨 있다. 나타 위에 시나몬과 슈가 파우더를 조금 뿌리니 달큰한 캐러멜향 위로 시나몬의 청량하고 알싸한 향이 코를 먼저 자극한다. 손으로 들고 한 입 베어 먹어 보았다. 빠삭! 하는 소리와 함께 페스트리가 입안에서 겹겹이 부서지며 그 사이로 녹진하고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터져 나오듯 입안을 가득 채운다. 나타를 한 입 먹은 뒤 에스프레소 한 모금은 필수다. 진한 커피 향과 함께 그보다 더 진한 쓴 맛의 에스프레소는 나타의 고소하고 향긋한 단 맛을 몇 배나 맛있게 만들었다. 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나타와 에스프레소의 조합은 거부할 수 없는 맛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맛에 놀라 몇 개를 더 주문해서 먹고 다시 몇 개는 포장까지 했다. 호텔에서 맥주와 함께 먹어 보니 역시 내 입에는 에스프레소와 같이 먹는 게 가장 낫다.


출처: pixabay


벨렝 지구

리스본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약 7km 떨어진 벨렝은 옛날  대항해 시대의 영광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항로와 범선 카라벨을 개발하여 마데이라 제도와 아조레스 제도, 희망봉을 발견한 해양왕 엔리케를 필두로 아프리카 대륙을 지나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한 마젤란 등의 많은 탐험가들이 항해를 통해 구해 온 희귀한 물건들과 향신료 등의 유통으로 포르투갈의 번영을 이끌었고 부유함은 예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테주 강 하구에 세워진 벨렝 탑, 제로니무스 수도원, 발견 기념비, 해양 박물관, 벨렝 궁전, 마차 박물관 여러 관광지에서 대항해 시대의 역사와 흔적을 만날 수 있.


벨렝 지구

파스테이스 드 벨렝에서 가볍게 점심을 해결한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가기로 했다. 입장권은 따로 구입하지 않고 오늘 개시한 리스보아 카드로 무료입장했다. 입구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리스보아 카드 전용 입구에서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리스보아 카드

리스보아 카드는 여행자들을 위한 시티 카드인데 리스본의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공항버스도 할인받을 수 있다. 여러 관광지에서 무료입장 또는 할인을 받을 수 있고 24시간권, 48시간권, 72시간권으로 나뉜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1502년 마누엘 1세에 의해 건축된 제로니무스 수도원 포르투갈 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물로 리스본 항구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누엘 1세의 이름을 따서 '마누엘 양식'이라 불리는 고딕, 스페인, 플랑드르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이라 한다.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어떤 부분이 특별한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정을 둘러싼 회랑과 천정의 장식들이 좀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길을 건너 테주 강 쪽으로 가면 바다처럼 넓은 테주 강을 향해 막 돛을 펴고 항해를 떠날 것 같은 큰 구조물이 있다. 바로 해양왕 엔리케 사후 500년을 기념해 세워진 발견 기념비이다. 엔리케 왕자가 개발한 범선 카라벨의 돛을 활짝 편 모습을 형상화했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지만 별로 볼 게 없다는 말도 있고 리스보아 카드로 무료입장이 안 돼서 굳이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발견 기념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서 카메라에 다 담기지도 않았 멀리서 찍어야 전체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대항해 시대의 기상이 느껴지는 듯하다. 발견 기념비 앞 광장 있는 커다란 나침반 안에 세계 지도그려져 있어서 한국은 어디 있나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출처: pixabay
발견 기념비 앞에서

벨렝 탑까지는 트램을 타고 두 정거장이지만 걸어서도 그리 멀지 않아서 강을 따라 걸어가기로 다. 날씨는 너무 화창하하늘은 구름도 없이 맑았다. 여름같이 더운 날씨에 한참을 걸었더니 그늘을 찾아 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얀 테이블이 놓여 있는 분위기 좋은 노천카페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 같아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뜨거운 태양이 따갑지도 않은지 서양인들은 여지없이 햇빛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늘에 앉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눈부시게 반짝이는 테주 강을 보니 휴양지가 따로 없는 것 같다. 오늘 우리의 여행 컨셉은 여유인가 보다. 안주도 없이 맥주만 한 잔씩 시켜놓고 한없이 바다 같은 강을 보고 앉아 있었다. 할 수 없이 행복했던 그 순간이 지금도 그립다.


테주 강가 노천 카페


탑의 모양이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처럼 보인다고 '테주 강의 귀부인'이라 불리는 벨렝 탑은 처음에는 바다와 이어지는 테주 강 하구에 세워져 리스본으로 들어오는 선박을 감시하는 요새였다. 1층은 정치범 수용소, 2층은 포대, 3층은 망루와 세관으로 쓰였다.  후 우체국, 세관, 등대 등 여러 용도로 이용되었고 역사적 배경과 화려한 마누엘 양식의 건축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벨렝 탑


몇 달에 걸친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는 선원들은 아마도 테주 강에 들어서 벨렝 탑을 보는 순간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수많은 세월 동안 엄청난 역사와 사연을 담고 고요히 서 있는 벨렝 탑은 그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있어 보였다. 리스보아 카드로 공짜로 들어갈 수 있지만 입구가 한 군데뿐이라 기본적으로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해서 일찌감치 내부 관람은 포기했다. 원래는 아침 일찍 서둘러 오픈 시간에 맞춰 입장하려고 했었는데 좀 아쉬운 생각이 든다. 대신 벨렝 탑 옆에 조성된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벨렝 탑과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한껏 여행의 순간을 즐겼다.




코메르시우 광장 (출처 : pixabay)

벨렝 지구를 뒤로하고 다시 트램에 오른다. 도착한 첫날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고 싶어 서두르게 된다. 광장을 가로질러 강가로 가보니 일몰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작은 백사장이 있어서 더 바다같이 느껴지는 테주 강이 점점 노을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시간 맞춰 잘 도착한 우리는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든다.



붉게 일렁이는 강물에 내 마음도 함께 일렁이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출을 보며 시작했던 긴 하루가 저물어가는 석양과 함께 마무리되는 기분이다.


감상에 빠지는 것도 잠시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 아우구스타 개선문에 오르기 위해 또 발걸음을 재촉했다. 폐문 시간이 되기 전에 아우구스타 개선문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개선문 위에서 보는 코메르시우 광장과 테주 강의 전망이 너무 좋다고 해서 꼭 올라가 보고 싶었다.



역시 리스보아 카드로 무료입장을 할 수 있었 어느 정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다음 꼭대기까지는 몇 층 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늦은 시간이라 우리 말고 두 명 정도 여행객이 있었는데 곧 내려가서 딸과 단둘이서 맘껏 이쪽저쪽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전망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앞에는 코메르시우 광장과 테주 강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뒤를 돌아보면 쭉 뻗은 아우구스타 거리와 리스본 시내가 온통 내려다 보인다. 눈 앞에 보이는 너무나 전망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때 찍었던 사진 속 우리 둘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우리만 있었고 마치 구름 위에 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 많이 추웠는데도 해가 지고 야경 불빛이 반짝일 때까지 우리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포르투갈 여행을 한 여러 여행자들이 리스본보다 포르투가 훨씬 좋았다는 얘기를 많이 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도착한 순간부터 리스본이 정감이 가는 것 같았다. 거리의 모습부터 칠이 벗겨진 담벼락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다. 심지어 넘어져 생긴 커다란 혹을 앞머리로 가리고 수시로 얼음 찌질을 해가며 돌아다녔는데도 그날 하루 정말 행복했다.


지금도 벨렝 지구의 눈부신 햇살과 푸른 강물이 눈에 선하다.

언제쯤이면 그 아름답고 빛나던 리스본에 또 가볼 수 있을까.

기약도 없는 기다림에 나는...

그때의 내가 지금 너무나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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