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백마와 테니스의 시간

by 청사


사연이 많은 역사의 바람이 불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지가 뜨겁게 나를 반기는 곳도 아니었고, 누구로부터 초청을 받아 만나러 가는 길도 아니었다. 우연히 앞을 지나다 부딪친 여운의 속내를 헤집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연못과 돌담으로 구성된 요새의 차가운 맛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궁금증으로 시작된 작은 여정이었지만 경계하는 눈빛은 더욱 강해졌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확실하게 경직되었다. 가는 길목에는 다둥이 연꽃이 속삭이다 건성건성 인사를 했고, 많은 세월을 축적하여 내공을 다진 나무들은 곧은 시선으로 눈빛을 맞췄다.

두려운 시선이 이끄는 대로 가다 보니 발아래 깔린 고요함과 엄숙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평범함이나 보통이 사라진 곳이었다. 이윽고 눈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기념품을 파는 곳이었다. 국화(菊花) 문양을 한 상품들이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국화문양이 있는 다기(茶器)함을 손에 집었다. 그리고 알 수 있게 만든 사진첩을 손에 넣었다.

얼떨결에 구매한 《천황 4대의 초상》(天皇四代の肖像)에는 군복을 입고 백마를 탄 지도자가 언덕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복을 입었기에 평화의 시대가 아니었고, 많은 사람을 대동하였기에 큰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마와 군복은 그렇게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얼굴에 둥근 안경을 끼었고, 콧수염이 있었고, 위상을 알게 하려는 듯한 장식품이 세상을 제압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 서있던 모습에는 칼보다도, 총보다도 더 날카로운 엄숙함이 서려 있는 듯했다. 백마를 탄 모습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빽빽하게 박혀있는 듯했다.

사진첩을 넘기면서 문뜩 속삭였다.


“언덕 위에서 백마를 타고 지휘하는 모습은, 대포 위에서 웃는 모습은, 거대한 군함 앞에서 하얀 복장을 한 모습은, 아이를 안고 있는 단란한 부부의 모습은, 군중의 환호와 연호를 받는 모습은, 지도자로 있던 시대는 전쟁이었을까 아니면 평화였을까?”


“지도자로 살아야 하는 숙명은, 희생으로 물들여졌다는, 충과 효가 전의로 탈바꿈하고 말았다는, 애국이 애끊는 안타까움으로 피어났다는, 평화의 시대로 여기기엔 너무 많은 상처가 생겼다는, 청춘들이 먼지로 사라졌다는, 깊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는 것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


총탄이 가슴을 통렬하게 저격하는 순간이 죽음의 시작이었고, 관통하여 속살이 터지는 순간이 삶의 종점이 되었다. 청춘을 누리다 전장으로 갔고, 삶을 살다가 전쟁을 하였고, 님을 부르다 죽어갔다. 꽃을 피우지 못한 청춘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무엇으로 위로하고 알지 못했다.

허허벌판에서 황궁을 향해 군복을 입고 군모를 벗어 90도 각도로 예의를 다한 어느 군인의 모습도 있었다. 전쟁을 끝내주어 황송하다는 인사보다는 지키지 못해서 사죄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큰 예절에는 살아남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표현이 담겨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첩이 보여주는 역사를 보면서 다양하게 새겨진 감정들이 녹슬지 않고 뭉클한 무엇인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좋아서 그런지 좋지 않아서 그런지 금방 판가름이 났다. 그렇다고 포효하거나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오랫동안 관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침통한 장송곡이 흘러나오면서 사람들의 감정 샘을 자극하였고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분명 슬픔의 쓰나미가 덮치는 형상이었다. 그것은 나를 혼돈 속으로 잠시 휩쓸고 갔다. 칠흑 속으로 빨려간 검은 감정이 온몸을 칠하고 있었고 무언의 소리가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가장 눈에 들어온 단어는 평소에 듣거나 보기 어려웠던 ‘붕어(崩御)’라는 생소한 단어였다. 고전이나 사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낯선 언어가 현실에서 당당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을 후비고 있었다. 애도의 물결이 이루어지고 함께 하는 사람이 많아 ‘일본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아프게 다가왔던 단어는 ‘파란의 쇼와 폐막’이었다. 부드럽지 않은 거친 세파로 많은 어지러움이 생산된 시대가 갔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동시에 전쟁, 황폐, 붕괴, 죽음, 카미가제(神風), 식민지지배, 일본 패전과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후지산 기슭에서 당당하게 세상을 호령하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진 것이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촘촘한 발길이 떠남을 밀도 있게 옮겼다. 장중한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길은 생사가 갈리는 것을 의미했고, 동시대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암시했고, 많은 것을 안고 가는 듯했다.

길가에서 조용히 잔잔하게 배웅하는 노인의 예의와 간절하게 무릎을 꿇은 노파의 합장은 억 말리 먼 세상으로 떠나는 길을 밝히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허리를 굽혀 예를 차리는 젊은 한 쌍의 살뜰함은 마지막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소리 없이 파르르 떨고 있는 백성의 입술은 많은 것을 말했고, 눈 안에 그렁그렁 맺혀 뛰어내리고 있는 눈망울은 많은 것을 씻어내고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고개를 숙였던 어느 군인의 마음과 붕어로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던 어느 노인의 마음에는 누군가가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조용하게 침묵하고 잔잔한 느끼는 마음에는 표현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이번에는 《사진첩》에서 테니스를 치는 젊은 지도자가 클로즈업되었다. 테니스 코트에서 우아한 운동복을 입고 다정하게 운동을 하는 모습이었다. 테니스와 우아한 운동복이 하나가 되었다. 따듯한 기운이 감싸고 있었기에 그곳은 분명 평화의 시대였다.

어느 날 ‘즉위(卽位)’라는 기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테니스 코트에 있던 젊은 지도자가 전통적 즉위 복을 입고 새로운 국가 지도자로 선포하기 위한 의식의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알고 보니 한 시대와 지도자가 가고 새로운 시대와 지도자가 됐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중차대한 선포였다.

새 지도자는 역사를 계승하는 선물과 역사가 남긴 여운을 유산으로 받는 듯했다. 선물은 새 역사를 만들어 갈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의미했다. 다른 하나는 역사가 남겨준 짐을 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대와 함께 차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세간의 시선은 우호적이었고 갈채와 환호를 보냈다. 즉위 기자 회견에서 ‘국민과 함께 일본국헌법을 지키고, 책무를 다할 것을 맹세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리고 평화를 이룬다는 의미를 가진 헤이세이(平成)를 연호로 선언했다. 시대의 절연을 통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의식이었다. 평화를 강조한 것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고 싶었다.

새로운 시대와 함께 새 지도자의 시간이 되었다. 전통적인 의식에 따른 즉위의 식(卽位의 禮)이 거행되었고 카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롤스로이 오픈카에 앉아 세상을 향해 흔드는 손과 웃는 얼굴에는 과거의 흔적이나 슬픔이 없었다. 오로지 현재가 있었고, 미래가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축하 카퍼레이드는 축하 연회로 이어졌다. 새로운 시대와 지도자를 축하하기 위해 왕족이나 귀족들이 속속 참석했다.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했다. 거기에는 겸손함과 예절로 구성된 평화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에는 갑자기 역사에서 범민과 지도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범민은 충성하는 존재였고, 희생을 하는데 존재가치가 있었다. 지도자는 충성을 받는 존재였고, 희생 위에 서는데 존재가치가 있었다.”는 말이 스쳐 갔다. 평화의 시대에는 범민과 지도자는 어떤 존재와 가치로 규정될지가 매우 궁금해졌다.

나는 ‘붕어’와 ‘즉위’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인이라는 신분이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을 감지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역사적 구도로 생긴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있는 감정과 이성으로 붕어와 즉위에 대해서 평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였다.

내가 내리고 싶은 평가는, 역사를 배우면서 형성된 사실, 일본에 살면서 접한 좋은 경험과 좋지 않은 경험 등에 기초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를 비판하거나 칼날을 들이대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픈 과거와 동행하는 현재라는 시대를 넘어 미래를 위해서 그것이 담은 참뜻을 깊숙이 음미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새 지도자는 ‘국민과 함께’라는 맹세를 한 후 그 신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각지의 피해지를 방문하여 일본인을 배려했다. 의전이나 경비도 최소한으로 했고, 화려한 복장이 아니라 소박하게 점퍼를 입고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로 시선을 맞추어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속에서는 “한국인이 입은 상처는 어떻게...”라는 말이 절로 속삭여졌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국을 방문하여 언급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청춘이 꽃피던 시절 테니스 코트에서 펼쳤던 평화로움이, 카퍼레이드에서 피어낸 웃음이, 만찬장에서 맞는 겸손함이 역사를 치유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치유하는 것은 명예와 영광으로 승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새 지도자의 시간이 되었기에, 얼룩진 역사에 다가가기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백마를 타거나 테니스를 친 적이 없었지만, 사진첩에 없는 현재와 미래에는 화해를 위한 백마와 테니스가 되기를 기대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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