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안! 너의 16년을 내가 쓰는 거.
아침 일찍 일하러 간 엄마가 낮에 돌아왔다. 엄마에게서 병원 냄새인가? 무슨 냄새가 났다.
누군가 우리 집으로 선물 같은 박스를 배달해 줬고 엄마는 얼른 하나 꺼내서 먹었고 또 그 냄새가 많이 났다.
다음날 이모가 음식을 싸갖고 와서 오래 있지도 않고 엄마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면서 돌아갔다.
엄마는 이제 밖에 나가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자꾸 눈물만 닦았다.
거울을 백번 보고 백번 울었다.
나는 엄마 얼굴에 병이 난 것을 알았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다 들여다볼 수가 있다.
엄마는 웃지 않고 말하지 않고 쉼 없이 눈물을 훔쳤다.
물론 아빠 하고도 마주 보지 않고 함께 밥도 먹지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
엄마얼굴 반쪽이 바보가 되었다.
예쁘지 않고 무섭게 생겼고, 그렇게 생긴 엄마얼굴에 난 깜짝 놀랐고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얼굴이 무서운 바보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를 안아주는 엄마가 좋다. 나를 안고 엄마가 편히 쉬고 잘 자고 나면 엄마얼굴이 다시 예뻐졌으면 좋겠다.
모자를 쓰고 하루 한번 병원에 가는 일 빼고 엄마는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난 엄마가 일하러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있어서 좋았다. 엄마얼굴은 아주 조금씩 다시 펴졌다.
엄마는 전화를 받거나 집안일을 조금씩 하다가도 한자리에서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와 함께 느릿느릿 동네 산책을 길게 하고 가본 적 없는, 좀 멀리 있는 공원에서도 긴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책상에 앉아 오랫동안 글을 쓰는 엄마는 무슨 말을 노트에 대고 그렇게 길게 하는지 궁금도 하다.
엄마얼굴이 예전처럼 예뻐졌다!
이젠 바보얼굴 때문에 울거나 고개 숙이지 않지만 여전히 잘 웃지는 않는다.
다시 일하러도 가고, 집에 올 땐 시장을 조금 봐오고 조용히 주방과 엄마방으로만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내가 아기였을 때는 엄마기분도 모르고 계속 뛰어다니며 엄마를 정신없게 만들었지만 이젠 소파 위에 엎드려서 엄마를 살펴보고 있다. 우리 엄마가 활짝 웃으며 큰소리로 나를 부르고 번쩍 안아주면 좋겠다.
겨울이 오고 있다.
엄마하고 언니하고 함께 돌아왔다.
엄마가 공항에 가서 언니를 만나고 함께 돌아왔다.
언니는 큰 가방을 밀고 왔고 그 속에서 내 꺼 예쁜 비옷이 나왔다.
핑크색에 모자도 달리고 꽃무늬 띠가 둘러진 비옷을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엄마가 입혀주면 기분이 참 좋았다.
오빠도 군인 아저씨 졸업휴가를 와서 오랜만에 온 식구가 다 모였다.
엄마는 큰 마트에 다녀와 집에서도 음식을 많이 만들고, 나를 빼놓고 다 같이 밖에 나가서 고기를 먹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식구들은 나하고 있을 때만 잠깐 즐거워했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를 따라 엄마 방으로 들어가고 때때로 언니랑 산책을 하거나, 오빠랑 산책을 다녀왔다.
아빠는 회사에 가고 집에 오고, 엄마나 언니랑 큰소리로 싸우듯 말하고, 방바닥이 울리게 쿵쿵 걷고, 방문을 꽝꽝 닫고, 그렇게 지낸다. 언니가 집에 온 지 며칠 후 엄마는 아빠에게 "왜 약속을 안 지키냐"라고 계속 물었고 아빠는 소리치며 눈을 크게 뜨고 옥신각신 하다가 엄마를 밀쳤다.
오빠가 방에서 나와 아빠에게 뭐라 뭐라 하고 엄마를 엄마방으로 데리고 갔다.
난 엄마침대 끝에서 엄마가 울지 않고 깊은 숨을 여러 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정말 오랫동안 내가 이 가족과 함께 한 세월 동안 나는 마음 한구석이 언제나 불안했다.
아빠가 큰소리를 칠 때마다 난 귀를 닫고 내 방석에서 웅크리고 가만히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각자의 방에서 조용히 있다가 아빠가 나오라고 하면 나와서 훈계를 듣고,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고 또 나오라고 하면 또 나와서 훈계를 들어야 했다. 엄마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빠가 다시 나오라고 할 때 엄마가 안 나가면 아빠가 엄마방으로 와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거실과 엄마방을 오가며 엄마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큰소리로 훈계를 했다.
"니가 나를 무시하니까 그 따위로 행동하지"
"니가 언제 가장대접 제대로 해봤냐?"
"자식들이 애비를 우습게 아는 것도 다 애미가 돼갖고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이 모양이냐? 응?"
엄마는 너무 지쳤고 이제 언니 오빠도 어른이 됐기 때문에 아빠와 함께 사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며칠 후면 언니도 다시 미국으로 가고 오빠도 군인 아저씨를 완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갈 건데 엄마는 아빠하고 둘이서만 이런 불안을 이기고 살 수 있을까?
만약 엄마가 또 얼굴바보가 된다면 진짜로 진짜로 슬프고 슬픈 일인데......
엄마와 언니는 바쁘게 외출을 다녀오고 심각한 듯 이야기를 길게 하고 어쨌거나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빠가 약속한 돈을 안 줘서 엄마가 이모한테 부탁했고 이모가 돈을 빌려줘서 해결됐다고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옷, 엄마책, 엄마 이불, 주방 살림 조금, 엄마는 보따리를 챙겼다.
언니랑 엄마랑 두 번 오고 가고 세 번째 내 꺼 살림과, 나를 안고 엄마차에 타고 달려서 낯선 아파트로 들어왔다. 우리 집 보다 작고 깨끗한 새집인데 오피스텔이라고 했다.
언니가 바쁘게 청소를 했고 아주 조금밖에 안 되는 살림들이 제자리도 모르고 여기저기 묶인 채 놓여있다.
나는 오늘부터 여기서 엄마하고 둘이 살게 됐다.
여기가 우리 엄마집이다!
언니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오빠도 이제 군인아저씨가 아니다.
오빠는 미국에 가기 전 엄마집에서 나랑 같이 살았다.
처음엔 아빠집에 살면서 가끔 오더니 언제부턴가 엄마집에서 쭉 지내다가 미국으로 갔다.
이젠 정말로 엄마와 나 둘이서만 여기서 살고 있다.
엄마는 마음대로 큰소리로 나를 예뻐하고 씩씩하게 웃고 전화도하고 일하러 가고 집에 오면 반드시 나랑 산책을 간다. 엄마집에 와서 제일 좋은 건 산책길가에 족발집에서 매일매일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거다.
어제는 그 집 앞에 앉아 보았다. 엄마집에서 자고 나면 여기 족발집으로 와서 하루를 보내도 좋을 것 같다.
엄마는 그 집 족발을 언제 먹으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