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살인충동 느끼네요

[ 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푸른숲 ]


[ 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푸른숲 ]


 당신은 살인자다. 당신은 당신을 상처 입힌 자들을, 무한대에 가까운 방법으로 '상상 속에서' 죽여 왔다. 고층 빌딩에서 밀어버렸을 수도 있고, 불에 태워 죽였을 수도 있다. 당신이 식사를 차리는 데 쓰이는 부엌칼로 심장을 찔렀을 수도 있고, 그 사악한 자들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들으며, 거대한 죄책감보다는 그들이 받아야 하는 '대가'를 치른 것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될 인류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바로 당신의 '존재를 상처 입힌 일'말이다. 


 물론 위의 행동들을 실제 현실로 옮길 수는 없다. 만일 저런 행동을 실제로 저질렀다면 그 즉시 '법'이라는 융통성 없는 놈이 당신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감옥에 처넣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살의(殺意)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저 참고 또 자신을 탓하기만 하며 사는 수밖에 없는 걸까? 

 신은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것을 선사함으로써 작은 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당신은 당신이 증오하는 그 사람을 당신의 상상 속에서 끝없이 되살렸다, 다시 죽여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당신의 살의는 조금이나마 진정되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격렬한 살인 후에는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상상은 결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 좌절감은 당신의 증오가 깊을수록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정말로 우리의 이 비밀스러운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 그렇게 '악'한 것일까?

 피터 스완슨의 [ 죽여 마땅한 사람들 ]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정면으로 '아니'라고 말한다. 유능한 사업가 '테드'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라운지 바에 앉아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그는 출장 나가기 며칠 전 그의 아내 '미란다'가 건설부인 '브래드'와 바람을 피운 것을 목격했고, 그들에 대한 증오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빨간 머리의 여자 '릴리'가 그에게 말을 건넨다. 그들은 술기운에 기대 테드의 고민을 나누고, 릴리는 그에게 어찌하고 싶은지 묻는다. 테드는 웃으며 '아내를 죽이고 싶다'라고 말한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릴리의 대답은 그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준다. 릴리는 한 치의 웃음기도 없이 테드를 바라보며 말한다.

 "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에요. 솔직히 난 살인이 사람들 말처럼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주인공 '릴리'는 남들과는 다른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매일 밤 섹스 파티를 벌이는 부모, 자신을 강간하고 싶어 하는 젊은 화가, 앞에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뒤에서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던 남자친구를 겪으며 릴리가 내린 결론은 '그들은 응당한 벌을 받아야만 한다.'였다.

 릴리는 이를 위해 화가를 죽여 말라버린 우물 속에 암매장하고, 그의 바람피운 남자친구를 사고로 위장시켜 죽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인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었기에 그녀의 살인은 의심받지 않았고, 릴리는 결국 자신이 저지른 살인은 옳은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해 살인을 저질러왔던 그녀가 이번엔 왜 처음 만난 테드의 살인을 도우려 하는 걸까? 또 그들의 살인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물론 이 해피엔딩은 당신의 가치관에 따라 해피(Happy) 할 수도, 한 해피(Unhappy)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소설의 흥미진진함도 뛰어나지만, '릴리의 시점'에서 이 책이 전개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은 릴리와 각 주인공들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이 그대로 그려진다는 특징이 우리가 평소에 알고 지냈던 '윤리관' 그 자체를 흔들기 때문이다.


 릴리의 시점에서 본 릴리의 삶은 한없이 불행하다. 그녀의 삶은 배신으로 얼룩져있고, 상처를 입힌 자들은 뻔뻔스럽게도 태연하게 살아간다. 릴리의 상처는 외면한 채 거짓과 추악함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것이다. 릴리는 '세상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각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릴리는 그저 '피해 망상증에 시달리는 범죄자'일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 자체도 각자의 상처로 짓눌러져 고통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위한 결단을 내린 릴리를 정의라고 말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상처를 견디고 살아가는 이들을 정의라고 말해야 할까.

 이러한 고민을 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소설은 어느새 끝이 다가온다. 그리고 작가가 던지는 이런 질문들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결말 역시 '열린 결말'로 이루어진다. 열린 결말은 독자 입장에서 너무나도 잔인한 처사이지만, 이 책의 정체성이 애초에 '해답'이 아닌 '질문'으로 이루어졌으니 어쩌면 이는 당연한 맥락인지도 모른다.


 나를 다치게 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은, 살인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안에 수없이 되풀이했던 이 상상은, 당신을 릴리와 동일시시켜 끊임없이 고민케 한다. 

 그 끝에 다다라 내린 당신의 결론은 역시 살인은 옳지 않다 일 수도, 혹은 정당하다 일 수도 있다. 당신이 내린 결정이 궁금해지는 오후의 한나절이다.


 혹시 지금 너무나 미워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릴리와 함께 상상 속에서나마 그 증오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는 게 어떨까. [ 죽여 마땅한 사람들 ]은 그 제목처럼,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것이다.

이전 05화 당신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