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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를 위한 나라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와이즈 베리 ]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와이즈 베리 ]


정의의 여신은, 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대한민국 대법원 홀에 세워져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외국 정의의 여신상들과 다른 점들이 있다. 외국의 동상들은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치아(Justitia, 영어 Justice의 기원)를 본떠 만든 것으로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법의 힘을 상징하는 칼을, 한 손에는 공평을 뜻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의의 여신상은 첫째, 한복을 입고 있으며 둘째, 눈을 뜨고 있고, 셋째, 칼이 아닌 법전을 들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정의의 여신만이 독특한 특징을 지니게 된 것은 법이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겠다는 생각과, 다른 어떠한 외부의 영향 없이 법에만 의존해 판단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가 담겨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궁금증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 자랑스러운 정의의 여신, 그분이 바라보고 있는 '정의'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우리는 당장 요즘도 사법부의 재판 결과에 불만을 표하며, 그들을 비판한다. 끔찍한 살인자에게 음주로 인한 감형이 내려지고, 수십억을 갈취한 사기꾼들에게 터무니없이 약한 형벌과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벌금이 주어지고…. 상식에 부합하지 못하는 판결은, 법이 얼마나 그 기준이 모호한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밑바닥엔 과연 정의란 것이 존재하며,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능적인 의문이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싶은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나는 그렇게 [ 정의란 무엇인가 ]를 펼치게 되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그 정의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아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을 빌려, 그는 정의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눈다. 공리주의 정의, 자유주의 정의, 목적주의 정의가 그것이다. 지금부터 그것들의 요점을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공리주의 정의의 대표 주자는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다. 이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개념을 만듦으로써, 정의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간단하게 정의正義는 쾌락을 올리고,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고 정의定義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그렇다면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박해까지 정의로운 행위에 포함되느냐는 의구심이 있다.

 두 번째로 자유주의 정의의 선수는 임마누엘 칸트와 존 롤즈이다. 이들은 정의란 그 '동기'의 순수함과 '선택의 자유'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결과는 제쳐두고 동기가 선한 것이라면, 그 행동은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동기는 개인의 무제한적인 자유 아래에서 선택되는 것이라고 철학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 관한 지적으로는 그렇다면 단순히 착한 의도만 행위자에게 있었다고 가정하면 / 이 때문에 최악의 결과가 발생했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인가,라는 것이 있다.


 마지막 목적주의 정의의 주창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정의란 '목적'을 지니는 것, 그리고  목적이란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미덕美德을 칭송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정의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를 품고 있는 것으로 공동체가 합의해 만들어나가는 가치임을 그는 강조한다. 그러나 이에 따르면 대리출산, 징병제와 모병제, 낙태 등 공동체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려 아직도 논쟁 중인 사안들에 대해서는 그 답이 명확히 내려질 수 없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이 3가지 주장 중 마지막, 즉 '목적주의 정의'를 옹호하고 있다. 그는 공동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의가 그 기능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에게는 이 정의를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수단이 법이고, 법이란 곧 우리 모두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체계인 셈이다. 그는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민의 역할, 특히 '참여하는 시민'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그래야만이 정의가 정의로서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난 후, 나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앞서 말했듯이 목적주의 정의란 의견이 반으로 나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국 특정 집단이 정해놓은 정의에 따라 그 결론이 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특정 집단은 그 사회에서 소위 '힘 있는 / 권력 집단'들이 될 가능성이 현저히 높을 것이다.

 '군부 독재' 시절을 겪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서, 나는 이 주장이 자칫하면 민주주의보다 '독재주의'로 빠질 수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만일 총과 칼로 무장한 이들이 정의의 내용을 정하고 / 나머지 대다수 시민들은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어도 따라야 한다면, 진정으로 더 나은 공동체가 우리는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못할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피 흘려 쌓은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정의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말 '정의'란 무엇일까? [ 정의란 무엇인가 ]를 이해하는데도 몇 번을 다시 읽었어야 할 정도로 쩔쩔맨 나로서는, 당연히 그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책의 내용 중 내 신념에 가장 부합하는 정의 이론을 꼽자면 이는 '존 롤즈'의 정의론이었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그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부여하되, 그 노력의 결과로 인한 불평등은 인정했다. 단, 하나의 조건은 그 불평등은 '제일 약한 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라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더 발전시켜야 할 방향으로 생각된다. 솔직히 공리주의처럼 결과만을, 자유주의처럼 동기만을 추구하다 보면 사회는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하지만 존 롤즈의 이론은 보다 평등한, 그러면서도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함'을 갖추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비록 그의 이론도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가 더 현명해지는 시간이 온다면 이는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가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의 정의의 여신상은 지금도 대법원 중앙홀에서, 두 눈을 뜬 채 자리에 앉아 있다. 그녀는 위의 이론들 중 어떤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선악을 평가하는 것일까. 적어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지금의 사법부 판결에 거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정의가 우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정의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의의 '기준'을 조금씩 수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의도 결국엔 일종의 가치이다. 그리고 가치는 결코,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상황에 맞게, 현실을 유토피아Utopia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고치고/바꿔야 하는 것이다. [ 정의란 무엇인가 ]는 진실로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정의의 여신께서 그 무거운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정의란 무엇일까.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고, 또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문제거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정의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가치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회'에 살 수 있는 조건일 테니까. [ 정의란 무엇인가 ]는 그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만이, 정의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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