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는 좋겠다, 똥을 싸도 칭찬받아서

똥을 싸도 사랑받는다는 것

by 써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아이를 왜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가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논리는 아니지만, 크리스천으로서 꽤 흥미로운 포인트였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사랑으로 양육하며, 필연적으로 자녀의 실수로 인해 속이 상하면서도 결국 용서하게 되는 과정—그 깊고도 복잡한 감정은 부모와 자식 사이가 아니고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 나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문제라기보다는, 위기감에 가까웠다. 아내는 열 달 동안 아이를 몸에 품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출산한 후, 프로락틴 호르몬의 영향까지 더해져 자연스럽게 ‘모성애’라는 선물을 받았다. 반면, 나는? 눈앞에서 아이가 꼼지락거리고 있었지만, 그토록 말로만 듣던 ‘부성애’라는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약간의 죄책감, ‘대체 무엇을 위해 아이를 낳았나’ 하는 허탈감, 그러나 가장으로서 아이와 가정을 잘 꾸려나가야 한다는 책임감, 새벽마다 아이의 울음에 깨는 아내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


물론 부정적인 감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의 손짓과 발짓, 미소 하나에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뭉클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행복’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웠다. 현실은 여전히 고단했고, 밤마다 반복되는 피로 속에서 아이를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주고받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나는 변해 있었다. 힘든 일상 속에서 아이가 주는 행복이라는 ‘마취제’의 효과가 점점 강해졌고, 자꾸만 안아주고 싶어졌다. 아이의 볼에 내 볼을 비비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기저귀를 갈 때마다 발버둥 치는 아이를 보며 짜증이 나기보다는 웃으며 달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엉덩이에 보습제까지 꼼꼼히 발라주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아이가 똥을 싸면 그야말로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잘 쌌어!" 하며 칭찬을 하고 있었다. 뒤처리는 여전히 귀찮고 힘들지만, 그래도 잘 싸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니까. 똥을 싸느라 힘을 주는 표정과 소리도, 기저귀가 볼록하게 부푼채 기어다니는 모습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그러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좋겠다, 똥을 싸도 칭찬받아서."

그리고 순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살면서 수많은 ‘인생의 똥’을 싸며 살아왔는데, 하나님은 그런 나를 어떻게 보실까? 혹시 하나님도 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진 않을까.

"너는 좋겠다, 똥을 싸도 사랑스러워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