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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Aug 20. 2024

일상은 그냥 지켜지지 않는다

일상은 순조로울 때 아름다울 수 있다. 틈이 생기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더 이상 아름다움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순조로운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권태롭고 따분하다며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근무하는 날, 나의 일상은 장비와 시설의 관리, 민원 처리로 채워진다. 민원은 그때그때 상황이 달라서 대응하는 방식도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장비와 시설관리는 정말 순조로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만든다. 특히 어둡고 험한 곳에서 작동되고 있는 장비들이 역할을 다 해주어야 일상의 순조로움이 보장된다.  


아침에 근무하러 들어와 인수를 받는데, 전날 근무자가 정화조 배수펌프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정확히는 배수가 다 되었는데도 펌프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확인해 보니, 자동수위조절센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수시로 가서 배수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배수펌프를 수동으로 작동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수리하기 전까지는 동일한 방법으로 해주기를 당부하였다. 일상의 순조로움이 근무 시작부터 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화조실은 특별한 장소다. 특히 여름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악취와 날벌레의 괴롭힘을 받는다. 정기적인 순찰을 할 때 할 수 없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려 한다. 그런데 그날은 정화조 맨홀을 열어 수위을 확인하고 수동으로 펌프를 작동시킨 후, 어느 정도 빠져나간 걸 확인하고 펌프를 정지시키기까지 꼬박 정화조실에 머물러야 했다. 흠뻑 땀으로 젖은 옷에 향긋한(?) 냄새가 배어, 마치고 올라와서도 한참 동안 코를 괴롭혔다. 그래도 이날까지 배수펌프 자체는 이상 없이 작동되고 있었다.


하루 쉬고 근무를 들어온 날, 전날 근무자는 자동수위조절센서를 교체했으니 작동상태를 잘 확인하라고 인계했다. 이날도 순조로운 일상이 이루어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시로 가서 작동상태를 확인해 보니 수상했다. 수위는 바닥이고 배수펌프는 정지되어 있는데 작동되는 것으로 전시되는 것이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다음 근무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인계했다. 다음 근무하러 들어온 날, 결국 배수펌프 한 대가 고장이라고 판명되었고, 오늘 교체수리를 하러 온다고 인계받았다. 이날도 배수펌프 교체하러 들어온 사람들과 오전 내내 덥고 냄새 쩌는 정화조실에 머물면서 일상이 무참하게 찌그러졌다. 


빌딩마다 설비시스템은 유사하다. 빌딩의 용도와 규모에 따라서 추가되는 시스템이 있겠지만, 기본 골격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전기설비, 급배수 및 위생설비, 공기조화설비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설비마다 자동제어 기능이 가미되기도 한다. 문제가 된 정화시설은 급배수 및 위생설비에 포함된다. 이 설비들에 딸려있는 다양한 장비들의 작동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어느 것은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또는 자동제어에 방식에 의해서, 그리고 교호로 상시 작동되는 장비도 있다. 


빌딩의 시설관리 일을 한지가 이 년여가 되다 보니, 이제야 설비의 메커니즘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근무하기 전까지는 전혀 문외한이었는데 많이 발전했다. 이들 설비에 딸려있는 수많은 장비 중에서 음지에서 우직하게 소임을 다하던 장비가 삐그덕하면 그 여파가 크다. 사람도 착하고 묵묵한 사람이 한 번 성내면 무섭다고 하지 않는가. 바로 정화조실 배수펌프와 같은 장비가 여기에 포함되고, 문제가 발생되면 순조로운 일상을 좀먹게 만든다.    


빌딩의 설비시스템은 어떻게 보면 인체나 사회구조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든다. 정화조실 배수펌프는 인체로 보면 배변기능을 담당하는 신체기관이고, 사회구조로 보면 항상 대기상태에 있으면서 궂은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군인, 소방관, 경찰과 같은 제복 근무자(MIU, Man in Uniform) 라는 생각이 든다. 인체에서 배변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리고 제복 근무자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들의 안전한 일상이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부산 연산동 화재현장에서 소방관이 후미진 곳에서 라면을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가슴 먹먹함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었다. 그리고 화성 아라셀 화재 참사, 인천 청라 전기차 화재도 생각났다. 소방관들은 물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진화방식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피해자를 최소화하려는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번 재해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동원되는 군인들, 자유와 범죄 사이에서 공권력을 지키려 악전고투하는 경찰관들, 이들 모두가 하는 일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이들이 보이지 않는 험지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해주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이 순조롭게 보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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