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도 늡니다.
6. 스스로를 경멸하는 사람은, 경멸하는 자신을 존중한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반에서 8등으로 시작했던 저는 어느새 꾸준히 2등을 하는 수준이 되 어 있었습니다. 제 반에는 전교등수로는 저보다 훨씬 잘 하는 1등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실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그런 아이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비교를 많이 당했습니다. ‘둘이 똑같이 열심히 하는데, 왜 너는 항상 2등이니? 역시 타고난 머리란 것은 이기지 못하나보네.’
비교당하는 일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2등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아이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오던 아이이고, 저는 중학교 들어와서 정신을 차렸으니까요. 꾸준히 노력해온 시간의 힘이란 쉽게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저는 아주 싫고 미운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일까, 바로 저였습니다. 미리 좀 공부를 할 것을, 시험기간에 텔레비전을 끄고 좀 더 책을 볼 것을, 하며 혐오(嫌惡)감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1등을 하는 아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저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저는 더 나은 사람이 되 고 있었습니다. 뭔가 포기하려고 하는 모습, 집중을 하지 못하는 모습, 패배를 당연시 여기려는 모습이 싫었고 아 주 미웠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모습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계속해서 나아졌고요. 혐오(嫌惡)라는 단어는 이렇듯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내가 나의 어떤 모습을 싫어하는 지에 따라 내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나갈지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
저는 싫습니다. ‘발전하려 아등바등 노력하는 스스로를 사랑하자.’가 좋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발전하지 않고 정체된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던가, 발전하려하고 그대로를 거부하는 자신을 사랑하던가가 문제입니다.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웬만하면 운동을 하루 2번씩 했습니다. 그렇게 운동을 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새벽에 한 번, 그리고 점심시간에 한 번 또는 수업이 마친 뒤에 한 번 이렇게 진행했습니다.
가끔은 새벽에 눈을 뜨고도 몸을 움직이기가 싫을 때가 있습니다. 일어나기 싫어하다가 또 더 싫어하다가 다시 잠드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싫었습니다. 일부러 더 싫어했습니다. 그 모습을 혐오하고 경멸했습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요. 나는 나를 더 좋은 사람이라고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 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러고 있지를 못하니 미웠던 것이죠.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미워하다보니, 제 몸 역시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삶의 밀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 반에서 1등 하던 그 아이의 1분과 제 1분의 밀도는 달랐습니다. 인정 할 건 인정해야 바뀝니다. 제 밀도가 낮습니다. 노력의 집중도나 그 시간에서 얻어내는 것이 비교적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단 번에 이 밀도를 높일 수는 없습니다. 그냥 꾸준히 한 겹 한 겹씩 쌓아가는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최선의 노력 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노력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에 비교가 안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태릉선수촌의 운동선수가 ‘오늘은 가볍게 운동했어.’라고 했고, 처음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오늘은 죽을 정도로 했어.’라고 했다 합시다. 운동의 강도와 밀도는 태릉선수촌의 운동선수가 훨씬 높을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죠. 왜 그럴까요?
노력에도 역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력도 하면 할수록 늡니다. 처음에는 1만 해도 지치던 것이, 그 다음날 1.0000001을 하고, 그 다음날 1.0000002을 합니다. 하루하루 쌓아나가면서 노력에 대한 기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샌가 나의 일상적인 노력도 10이 되어있고 100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처음 시작할 때의 최선이었던 1의 노력은 몸 풀기가 되어 있을 겁니다. 안 해봐서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노력도 늡니다.
“스스로를 경멸하는 사람은, 경멸하는 자신을 존중한다.”
-프리드리히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