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다 연진아!

주제파악

by 유수한 책방

유튜브에서 고양이틈에 자란 강아지가 거울을 보고 깜짝 놀라 펄쩍 뛰고 거울을 피해 다니는 영상을 보았다

고양이 틈에서 자란 강아지가 캣휠에서 달리고, 고양이와 함께 낮잠도 잘 자던 강아지는 자기도 고양이인줄 알았다가 보게 된 거울 앞에서 놀라 방방 뛰는 모습이 그저 귀엽고 웃기기만 했다

태어난 지 서너 달밖에 되지 않은 강아지는 귀여울 뿐이었지만, 나의 미련함을 반추하면 슬픔과 창피함만 가득했다


수억 원대 빚, 언니집 더부살이에 수급자 지원을 받으며 사는 나를 주변사람들이 슬슬 멀리, 아니 대놓고 우리 멀리 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나와 우리 가족 얘기를 즐거운 험담으로 한다는 것도 사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남 말이 재밌는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에 , 카더라를 더해 말하기를 좋아했었다. 사람에 본성이 내가 잘되는 것보다 남이 안 되는 게 더 좋아한다는 말이 맞긴 했던 것 같다

나와 교류가 있던 지인들도, 내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가족에게까지 내 안부를 물었다는 말에,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진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까칠한 성격이었지만 , 그래도 타인의 고통을 확인하며 즐거워하는 어른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죽지 않고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생존이 가장 큰 목표였기 때문에, 내 삶의 고난을 본인의 행복으로 여기든, 뒷말을 하던지,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이런 타다 남은 내 곁에 남아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건 내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방증이었다


'우리 이제 고등학생 아니야

우정이 우정만으로 되니

앞으로는 주둥이 조심하고

분수에 맞게 들고

한도에 맞게 들자?

알았으면 끄덕여'


더글로리에서 이사라의 샤넬원피스를 입고 나온 혜정에게 경고하던 연진이은 한결같이 순수하다는 생각을 했다.

앞뒤가 같았던 연진이처럼 초지일관 '문동은 아니었음 너였어' 이런 식의 태도였다면, 최소한 이런 인간들 삶에는 탄생조차 없을 인간적인 위로는 바라지도 못했을 텐데..


세간에 떠도는 얘기들보다 더 우울한 얘기를 풀 곳이 없어 A 나누던 모든 대화들이, 내 천박한 삶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걸 몰랐다.

벌어지는 일들이 감당이 되지 않아 도망갈 것 같아 터놓았던 내 사생활의 치부를 그렇게 드러내는 것들은 솔직함이 내 딴에는 친밀함의 표현이라 믿었었다. 믿을만한 사람이라 말이 새나갈까 걱정되지 않은 마음에 쏟아지는 말들을 한껏 풀어놓았다

아무리 풀곳이 없다고 해도, 사람과 대화로 내 모든 감정을 쏟아내는 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말이 거칠고, 생각이 짧은 내가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스크랩해 놨던 인간관계 철칙 중 첫 번째

결점은 약점이 되고, 자랑은 질투가 된다는 말

그걸 알고도 그렇게 나는 내 흠결을 여과 없이 흘려보냈다 그렇게 마음속을 터놓고 돌아올 때면, 나는 세상에 나를 이해해 주는 단 한 사람을 감사해하며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는 A는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커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들을 서로가 묻어주고, 그래도 가장 좋은 친구라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내아이들 사이에서는 늘 상하가 생기는 법

우리 아이가 그랬다 마음이 약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차근차근 말하지 못하고 한참 참다가 여름 장마에 논두렁이 터지는 터져버리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애가 욱해..

그렇게 마음이 약한 애가 , 어떻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 걱정이라는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이후 정수리 쪽 두통이 가시질 않아 한 달 내내 두통약을 먹고도 하교 후 아이에게 전화가 오면 늘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너한테 뭐라 하면, 너도 얘길 해! 엄마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란 게 이런 식이였다

그게 안 되는 애한테, 단호하게 말하라는 것만 강요했었다


아이가, 엄마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아이를 말릴 수가 없다는 말에, 어떻게 놀렸는지

언제부터인지, 너는 어떻게 했는지 묻다가, 너도 하지 말고 엄마가 얘기하겠다는 말로 아이를 다독였다


단순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장난을 하니, 우리 아이는 내가 단속할 테니, A는 A의 아이를 살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이를 낳고 꼬박 15년을 이어온 관계인데,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생각을 했다


' 아이가, 엄마 이름을 부르며 패드립.. 그런 걸 하나 봐요.. 애한테 물어봐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며 A의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본인이 우리 아이를 덮어준 것, 본인이 우리 가정 얘기를 어디 가서 하지 않은 것, 내가 본인의 아이 뒷말을 했다는 것, 이번일은 남편과 아이를 데려와 사과하고 사과받겠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당황한 나는 A의 팔을 잡으며, 왜 그렇게 화를 내냐, 나도 우리 애를 볼 테니 서로 조심하자는 말이었다는 말에

우리 애는 당하기만 했는지 물었다


우리 아이를 덮어줬다는 말, 우리 가정이 힘들 때 어디 가서 말하지 않았다는 말

남편을 데려오겠다는 말.. 그 말보다는, 나와 우리 가족을 경멸하는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한참 가정형편이 좋지 않을 때,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채권자들은 귀신같이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 밤낮없이 전화를 해댔고, 집 앞을 서성이고 아이들을 찾으러 학교로 가겠다는 말을 했다

그럼에도 미동도 없는 나에게 선전포고 처럼 했던 말들이 ' 너 내가 가면 혼자 안 가, XX 데려가면 너 같은 건... ' 얼굴도 모르는 나하나 잡으려고 사돈에 팔촌까지 대동한다던 그들.


아이아빠도, 아이도 다 데려와서 사과받을 건 받고, 사과할 건 해야겠어요..

그렇게 말을 쏟아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 아저씨를 데려온다는 말에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라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헤어지고 나서 , 한참을 오고 간 대화를 반추하며 며칠 동안 내 잘못을 반추했다

그러던 중, TV에 나오는 한 연예인이 본인이 잘하는 건 ' 주제파악 '이라는 말을 했다


주 제 파 악


아....


그랬다. 나는 내 주제파악이란 걸 할 줄도, 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풍비박산이 난 주제에 어디, 얼굴을 뻔뻔하게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있는 척하며 사는 것 자체가 주제파악이 되지 않은 인간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눈을 감고 머릴 쥐어짜며 지난 시간,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던지 상관없다고 떠들며 지낸 시간들이 너무 창피했다


원망의 말들을 쏟아낸 A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었지만, 주제파악을 , 현실 자각이 되고, 오랜 시간 저급한 나를 상대해 주느라 속이 울렁거렸을 A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 분수에 맞게 들고 '

' 우정이 우정만으로 되니 '


연진의 한마디 한마디를 생각했다. 멋지다 연진아.. 고맙다 연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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