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종료음이 울린다. 무엇인지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빨래 더미를 건조기에 밀어 넣는다. 건조가 끝난 빨래 더미를 한 아름 안고 거실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갠다. 흰색 반팔 티셔츠, 검은색 팬티, 검은색 바지, 회색 티셔츠, 온통 무채색의 향연이다. 마치 절대 튀면 안 된다는 듯 보호색을 띠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모두 똑같은 것들 뿐인데...
아들은 무채색 티셔츠와 바지를 즐겨 입는다. 아니 대한민국 모든 청소년은 무채색 티셔츠와 바지를 즐겨 입는다. 심지어 성장기의 막바지에 다다른 대부분의 사춘기 남자아이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사이즈까지 95 나 100으로 통일되어 있다. 니 거 내 거 구분하기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매직으로 옷 안에 이름을 써 줬지만 그것도 어릴 때 얘기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학생부의 분실함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채색의 옷가지들은 주인님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렵다.
"우리 때는 물건 아까운 걸 알고 어떻게든 찾았는데 요즘 애들은 아까운 걸 몰라."
50대 선생님이 라떼 시전을 하시지만 귀담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라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떡여 드렸다.
# 사춘기 아들의 명쾌한 계산법, 교복을 대하는 그들의 생각
작년에는 때 이른 여름 더위로 5월 중순경부터 하복을 입었다. 신입생인 둘째 아들은 아침에 잘 입고 나갔던 새 교복 상의를 잃어버리고(축구하다가 어딘가에 벗어던진 것으로 추청 됨) 교복 안에 입었던 반팔 티셔츠만 입고 돌아왔다. 새 교복을 산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디다 두고 온 거야?"
"몰라. 가방 안에 넣어놓은 거 같은데 없어요. 내일 학교 가서 찾아볼게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아들의 교복은 돌아오지 못했다. 며칠 후 새로 사 입혀 보낸 교복 상의는 그냥 보기에도 3년은 되었을 것 같아 보이는 낡은 상의로 바꿔 입고 왔다. 이런 일은 첫째 아들도 있었던 일이라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바뀌었든 어찌 됐든 교복 개수만 맞으면 된다는 것이 아들의 생각이었다.
"누가 내 거 가져갔을테니까 걔도 교복 1개, 나도 1개. 공평하지." 아들의 명쾌하다 못해 쿨한 계산법이었다.
그날 난 당근마켓에서 벌당 5,000원짜리 헌 상의를 3 벌 샀다. 이제 잃어버려도 괜찮다.
교복은 아들에게 벌점을 맞지 않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사복데이'가 필요한가
우리 학교는 한 학기에 한번 사복을 입고 등교하는 일명 '사복데이'가 있다. 처음 이 행사를 실시할 때 교장선생님께서 우려의 목소리를 내셨다. 그 이유로 첫째, 아이들이 비싼 브랜드 옷을 입고 오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 아이들이 옷을 사달라고 졸라서 학부모님들이 경제적 부담을 느끼실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행사날,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서 교사들은 모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옷을 입고 온 아이들은 진짜 한 명도 없었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흰색, 회색,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운동장 가득 무채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마치 교복을 입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 저렇게 입을 거면 '사복데이'가 꼭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무채색인데 말이다. 우리 반 학생 oo에게 물었다.
"oo아, 어차피 집에서 입는 트레이닝복 입고 오는 건데 사복데이가 필요할까?"
"선생님, 당연히 필요하죠. 뭔가 저를 가두고 있는 옷을 벗고 정말 제가 되는 느낌이거든요. 아~ 이해하시려나? 이해 못 하실 것 같은데..." oo이가 대답하며 빙그레 웃었다.
# 사춘기, 무채색에 담긴 개취
사춘기 아들 녀석이 며칠 전 양말을 사달하고 했다. 좀처럼 뭘 사달라고 하지 않는 아이라서 조금 놀랐다. 나이키 로고가 그려져 있는 농구 양말인데 농구를 할 때 이걸 신어야 발이 안 아프다나.
한참 검색을 하다가 아디다스 양말을 보여줬더니 꼭 나이키여야 한단다.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뭣이 다른가?! 궁금하지만 굳이 캐묻지 않는다.
시장을 나가는 길에 농구하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 고등학생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근데 그 아이들 발만 보였다. 모두 나이키 양말을 신고있었다. 아... 그런 거였다.
무채색에도 스타일이 있는 거였다. 내 눈에는 검정은 다 같은 검정, 회색은 다 같은 회색이었는데 사춘기 아이들 나름대로 취향이라는 게 존재하는 거였다. 검정 티셔츠에 로고가 가슴에 있는 것, 등 뒤에 있는 것, 팔뚝에 있는 것...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그들의 취향이었다.
# 취향은 이해가 아니라 인정하는 것
무채색이라는 또래 집단의 공통성에 속해있으면서 은근슬쩍 자신을 드러내는 귀여운 취향이었다. 취향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교복을 입으며 단을 줄였다 늘였다 하는 것, 와이셔츠 단추를 서너 개 열어두는 것, 바지 밑단을 2번 접어 입는 것, 눈이 펑펑 와서 양말이 젖어도 슬리퍼를 고수하는 것... 너희의 취향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