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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붙박이별 Mar 30. 2024

센 언니대신 센 아빠를 만났다.

큰 언덕 같았던 센 아빠는 이제 없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없었는지도


"우리가 며칠에 처음 만났지?" 저녁 설거지를 하다 말고 남편이 물었다.

"3월 17일. 근데 왜?"  

 갓 결혼한 신혼부부도 아니고 17년이나 지난 을 물으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우리가 만난 지 오래되었다 싶어서..."

싱겁긴.


# 17년 전 봄, 당황스러웠던 만남


 우리가 처음 만난 건 17년 전 봄이었다. 동료교사의 소개팅 주선이라고 알고 나간 자리에는 상대의 아버지(지금 시아버지)도 나와 계셨다. 당황스러웠다. 다행히도 직업적 특성을 발휘하여  학부모 상담을 하는 교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만남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6개월 뒤 우리는 결혼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줄곧 소개팅만 해왔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항상 선을 봐왔다고 했다. 그날 당황스러웠던 사람은 남편도 시아버지도 아닌 오로지 나뿐이었다.


# 나에겐 없고 그에겐 있는 것, 센 아빠


 내 기억 속 아빠는  항상 즐거운 사람이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은... 제법 부유한 집에서 귀하게 자란 아빠'가족을 보호해 주는 존재'라기보다 내가 빨리 성인이 되어 '보살펴야 되는 존재'였다. 물론, 우리 아빠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심의 여지없이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 다만 아빠와 나의 포지션은 일반적인 부모-자녀의 관계와 반대였다. 아빠는 자신의 삶을 즐겼고, 나는 아빠에게 끊임없는 잔소리를 했다. 아빠는 가끔 사고를 쳤고, 나는 엄마와 함께 사고를 수습했다.

 이 관계에 지쳐갈 때쯤이었을 것이다. 남편과 내가 만난 그 계절이...


 서른을 목전에 둔 나는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그즈음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배려심이 있었고, 나를 사랑했으며 무엇보다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1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그때 나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 더군다나 그는 내가 원했던 아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고, 집안 대소사를 책임지고 결정하는 센 아빠였다. 아버지의 결정에 따르고, 그 보호아래 온 가족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꿈꿨다.


 시아버지는 센 아빠였다. 결단력이 있었으며 매사에 확신이 있는 분이셨다. 파워 E 셔서 대인관계도 매우 넓었고 지인들에게 존경도 받으셨다. 중학교 졸업 후 부모님(남편의 조부모님)께서 공부대신 취업을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를 거스르고 스스로 노력하여 이뤄낸 자랑스러운 결과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애매한 답변을 내놓으신 적이 없었다. 당당한 모습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큰 언덕처럼 느껴졌다.

 밝음 뒤엔 어둠이 존재하듯 그분의 장점이었던 결단력과 추진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부담으로 다가왔다. 가족들이 어떤 의견을 내든 답은 정해져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아버님과의 대화도 줄어갔다.



# 센 아빠는 이제 없다


 시간은 흘러 아버님은 70대 후반이 되셨다. 그리고 얼마 전 폐렴증세로 입원을 하셨다. 그동안 감기 한번 제대로 앓는 것을 본 일이 없었기에 가족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코로나19로 병문안은 병원로비에서만 가능했다. 로비에서 아버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내가 알고 있던 센 아빠는 온데간데없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몇 달 새 부쩍 나이 드신 모습에 잠시동안 할 말을 잃었다.

"뭐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금식을 하고 계신 아버님어이없이 꺼낸 첫마디였다.

  본인이 얼마나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했고 의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마치 학교 다녀온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조잘조잘 그날 일을 읊는 것 같았다.

 마음이 울컥했다. 큰 언덕 같았던 센 아빠는 이제 없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식들 앞에서 약해진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 큰 소리를 내셨을 것이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을 그 모습을 오늘 자식들에게 들키셨다.

 한때 믿고 의지했던 큰 언덕은 이제 없다. 이제 가 그분의 언덕이 되어드릴 차례다. 


출처 : Pixabay
민들레가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네가 거름이 되어줘야 꽃을 피울 수 있어."
"뭐? 내가? 내가 그렇게 필요한 존재란 말이야?"
강아지 똥은 얼마나 기뻤던지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았다.
비는 사흘동안 내렸고 강아지 똥은 온몸에 비를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다. 그리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 권정생 '강아지똥'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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