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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붙박이별 Sep 07. 2024

절반만 새벽형 인간

내 안의 '불안이'에게 묻다

# 절반만 새벽형 인간


휴직을 하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햇살이 눈부셔서 더 이상 누워있을 수 없을 때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년 동안 맞춰진 생체 시계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을 뜨면 5시, 알람도 필요 없다. 다시 잠을 청해봐도 아침 6시면 온몸이 깨어나서 누워있을 수가 없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새벽형 인간'인 건가.

새벽형 인간
일찍 일어나고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드는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본 '새벽형 인간' 정의에 의하면 나는 절반만 새벽형 인간이다. 일찍 일어나긴 하는데 잠자는 시간은 밤 12시는 되어야 하니 말이다. 2000년대 초반, 새벽형 인간에 대한 자기 계발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적이 있다. 책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인생의 성공은 새벽형 인간이 되어 하루를 계획하고 열심과 열정을 다해 살아내는 것부터 시작이다.'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시절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은 탓인지, 태생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계획하는 것을 좋아한다. 열심과 열정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유지 기간이 짧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렇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나는 절반만 새벽형 인간이다.



# 휴직자가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이유


아침 6시에 기상해서 토마토주스를 만들고 아이들 아침 먹여 학교에 보낸다. 청소, 빨래까지 마치고 외출준비를 끝내면 8시 30분. 이때부터 저녁까지는 나에게 허락된 혼자만의 시간이다. 갑자기 늘어난 혼자만의 시간을 계획하는 일은 쉽지 않다. 퇴근 후 저녁 먹고 치우고 나면 혼자만의 시간은 2~3시간 남짓이었으니까 4배는 족히 늘어난 시간을 계획하는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운동도 하루에 1~2시간 정도고 지인들 만나는 일도 하루 이틀이면 끝. 휴직기간은 2달 남짓이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엔 턱없이 짧다. 몇 일간의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계획은 '도서관 가기'

특별한 일정이 있는 날을 제외하면 대부분  앞 도서관으로 향한다. 에어컨 나오지, 핸드폰 충전도 할 수 있지,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골라 읽을 수 있지, 그중 제일은 이 모든 것이 공짜로 제공된다는 것이다.


아침 9시 오픈시간에 맞춰 한 손에는 2,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들고 열람실에 들어선다. 며칠 다니다 보니 제법 눈에 익는 사람들이 생겼다. 직장도 아닌데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 와서 책을 읽는 저 들은 분명 새벽형 인간임에 틀림없다. 열심과 열정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 절반만 새벽형 인간인 나는 그들 속에 속해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 안도감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새벽형 인간으로서의 성취일까?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불안일까?



# 내 안의 '불안이'에게 묻다


얼마 전 '인사이드아웃 2'라는 영화를 봤다.  주인공 라일리에게는 어린 시절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라는 감정만 있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된 라일리에게는 '불안이, 당황이, 따분이, 부럽이'라는 새로운 감정들이 생겨나게 된다. 나중에는 불안이가 라일리의 모든 감정을 통제하게 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가 주요 줄거리다. 불안이의 폭주를 막아낸 기쁨이 덕분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불안이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결국 모든 감정들이 조화를 이루고 주인공 라일리는 한층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지극히 영화다운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누군가는 버럭이가 감정을 통제하고, 누군가는 까칠이, 누군가는 소심이가 감정을 통제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는 불안이와 부럽이가 번갈아 가며 주도권싸움을 벌인다. 대부분의 경우 불안이의 승(勝)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계획을 세우고 보람 있는 하루를 보내는 것은 불안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다. 절반만 새벽형 인간인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불안이와 나에게 안도감을 준다. 쓸모 있는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감은 기쁨이나 행복감과는 조금 다르다. 마치 숙제를 끝마친 뒤에 느껴지는 해방감, 남들만큼은 해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다행스러움에 가깝다.  

 

인생이 노력한다고 해서 평탄한 길로만 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니 해방감이나 다행스러움에 중독되지 말자. 내 안의 '불안이'에게 묻는다.

이제, 기쁨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오늘은 도서관에 가는 것 대신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무 곳에나 내려보려고 한다. 그곳에서 정말 괜찮은 맛집을 찾아낼 수도 있고 매일 보던 풍경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안의 불안이를 한쪽으로 살포시 밀어둔다. 오늘 하루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괜찮다. 내 삶이 안도감 대신 풍성한 이야기로 가득해지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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