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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붙박이별 Aug 31. 2024

운명을 마주하는 자세

사주팔자 이야기

"언니, 사주 보러 갈래?"

동생의 전화였다. 성대수술 후 휴직을 고민하고 있던 터라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태어난 날과 시'로 어느 정도 정해진 삶의 그릇이 있다는 주장은 꽤나 흥미롭다. 

지금까지 사주본 건 2번 정도. 한 번은 대학교 때 대학로를 걸어가다 우연히  길거리 노점에서였고, 두 번째는 친구모임을 가다가 시간이 남아서 들렀던 강남역 길거리 노점에서였다. 그때는 사주를 보는 노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 정해진 운명, 사주팔자


처음 대에서 사주를 봤던 시기는 대학교 4학년, 진로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아가씨, 중생을 거느리겠어."

"저 그런 거랑은 거리가 먼데..."


 사주 보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별로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중생을 거느린다니 뭐 먹고살지 고민이 많던 대학교 4학년 생에겐 위안이 되다. 어쨌든 20년째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할아버지  돌팔이는 아니었던 걸로.(그 '중생'이 그 '중생'은 아니겠지만...)

 20대의 내가 꿈꾸던 40대는 어떤 시련에도 흔들림 없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난 여전히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때때로 좌절한다. 고민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 여전히 나약한 존재...


 그때처럼 이번에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믿지 않는다는 이성과 달리 아주 조금 마음이 부풀었다.



 # 결정이 쉽지 않은 이유

 

사주카페는 화이트 풍의 깔끔한 가게였다. 인테리어 덕분에 마치 피부관리실에 온 기분이 들었다. 내 또래의 젊은 사장님은 인상이 좋았다.


"음... 휴직 안 하시는 게 좋은데... 꼭 하실 생각이신가요?"

"이유가 뭔가요?!"

예상과 다른 사장님의 말씀에 당황해서 말이 뾰족해졌다. 

직장에서 20년 차, 40대 중반의 위치는 무언의 책임감이 있는 위치다. 일을 가장 잘 알고, 실수는 적으며 심지어 잘 해내야만 하는 위치. 그 중요한 자리를 개인 문제로 비우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것은 내 일을 동료 중 누군가는 나눠가져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이 뾰족해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너 지금까지 열심히 달렸으니 이제 좀 쉬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듣고 싶었고, 정해진 운명이라고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본인 성격 잘 아시죠? 꽉 짜인 생활 속에서 바쁘게 일해야 마음이 편하잖아요. 휴직해서 느슨해지면 마음이 힘들어질 수 있어요. 차라리 바빠야 에너지를 얻고 힘이 나는 사람이에요. 맞죠?! 쉬고 싶어도 쉬면 안 돼요."


확인사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고치고 싶었던 성격을 들켜버린 기분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론 사주에 바쁜 것이 정해져 있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남의 눈치 안 보고 기필코 휴직을 하겠다고 굳 다짐했던 마음에 살짝 균열이 생겼다.



# 운명을 마주하는 자세


 얼마 전 여름휴가로 바다에 갔었다. 보트를 타고 힘껏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갔지만 큰 파도가 밀려오면 자꾸만 해변가로 밀려 나왔다. 몇 번을 반복한 다음에야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해안가에서는 파도가 크게 쳐서 보트에 앉아있기 조차 버거웠는데 바다로 나가니 노를 젓지 않아도 파도를 즐기며 보트를 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힘들지 않게 땡볕아래서 바다만 쳐다보고 있을지, 조금 힘들더라도 보트를 끌고 파도와 맞설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운명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타고나는 그릇은 정해져 있지만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의 몫이다. 나는 휴직을 선택했다. 바빠야 에너지를 얻는 운명이라면 타인을 위한 바쁨은 그만두고 이제는 나를 위한 바쁨을 선택하기로 했다. 인생에서 타인의 눈치를 덜어내니 삶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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