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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Dec 12. 2020

나누는 즐거움

뜨거운 김치찌개에 쓱 녹아내리는 버터 맛!

ㅡ365 매일읽는 긍정의 한줄 ㅡ

나누는 즐거움
The sharing of joy, whether physical, emotional, psychic, or intellectual, forms a bridge between the shares which can be the basis for understanding much of what is not shared between them, and lessens the threat of their difference.

육체적, 정서적, 정신적 혹은 지적인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행위는 사람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한다. 이 가교는 서로 나누어 갖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서로 다름으로 인해 생길 수 있었던 위협을 줄여 주는 토대가 된다.
ㅡ오드리 로드 Audre Lordㅡ



우리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은 하지 않으면, 당연히 생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다음은 삶의 윤택함을 위해 일을 한다. 좋은 차를 보고, 더 넓은 집을 보고, 시간도 여유가 된다면 배도 타고 비행기도 타고 여행을 간다. 여행을 가서는 맘에 걸리는 사람이 생각나면 작은 기념품이라도 사 둔다. 내 마음과 물질과 시간의 여유가 생겨야 다른 사람이 생각나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내가 여유가 있을 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풂이 나눔일까...


그렇다면 부자들은 재벌들은 눈만 뜨면 나눔을 행할 텐데... '있는 사람들이 더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고 듣는다.

거꾸로 말하면 없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인가 보다. 뭐가 더 낫다는 거지?

부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말도 더로 하고 듣는다.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지?






내가 아는 부자 이야기다. 일단 그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이 컴컴해 사람이 희미하게 보인다. 거실 전등이 항상 다 꺼져있다. 햇살이 유난히 눈부신 날이면 더 눈이 침침하다. 그 부자와 점심 약속을 한날은 기분이 찜찜하다. 내가 얻어먹어야 하는 날인데도 메뉴를 본인이 고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 중에 하나이다. 밥을 산다면서 본인이 메뉴를 정하는 스타일.

얼큰한 라면 한 그릇 딱 먹고 싶은데, 느끼한 파스타를 산단다. 내가 준도움에 대한 감사로 밥을 산다니, 사실은 등심 스테이크정도는 대접받고도 남을 일이었으니 더 얄밉다. 할 수없이 먹어야 하는 사이므로 그냥 먹는다. 먹고 나서 더 가관이다. 커피는 내가 사겠다며 맘에 없는 커피를 사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에 어느새 카운터에 쫓아와서 자기 포인트에 올려달란다. 나는 처음 간 카페였고 그 부자는 단골인 카페였던 게다.

'잘 먹고 잘 살아라'하고 포인트를 올려줬다.



(365매일읽는긍정의한줄,린다피콘:책이있는풍경)



집에 돌아오는 길에...나 자신이 한심하다. '내가 인생 잘못 산 거 맞지?' 하고 자책을 한다. 나는 부자도 아닌데, 인사치레를 너무 많이 한다. 조교가 애를 써서 무언가를 도와주었을 때, 사실 당연히 할 일인데도 이쁜 조카 같아 휴대폰으로 커피 한 잔을 쏜다. 뭐 훈훈하니 좋다. 문제는 이쁜 조카가 왜 그렇게 많고 아들 같은 친절한 직원이 왜 그렇게 많은지 한 달에 휴대폰 부가세가 모두 다, 한 잔 두 잔 쏜 커피가 모여 심지어 한도 초과로 결제가 안된 적도 있다.


'제정신이야' 하고 휴대폰 사용 내역을 뒤져본다. 커피 한잔 한잔 다 생각이 난다. 이 커피는 그게 고마워서, 이 커피는 그게 감사해서, 이 커피는 너무 친절해서 기분이 좋아서... 다 이유가 있다. 생각해 보면 나를 즐겁게 해 준 고마움을,  감사함을,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 준 다른 사람들의 나눔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부자는 3대를 간다는데, 때론 손에 꼭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후대는 망하는 경우도 있다. 나눔은 돈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닌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이다. 어릴 때 집에서 부침개를 하면 엄마는 꼭 한 접시를 담아 앞집, 옆집에 심부름을 보내셨다. 고기를 넣은 것도 아니고 그냥 신김치 쭉쭉 찢어서 부친 김치전에 엄마는 마음을 담아 두루두루 나누셨고 그 김치전 배달 심부름 담당이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나눔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코로나 19 녀석이 집콕하란다. 집사님(남편)과 그 어느 때보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니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시간의 나눔은 물질의 나눔과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물론 누구와 나누느냐가 관건이지만 말이다.

함께 대화하고, 웃고, 드라마를 보고, 산책을 하면서 좋은 감정이 생긴다. 있었던 좋은 감정은 더 커진다.

즐거움을 함께 나누다 보면 혹 맘에 두었던 섭섭함도 슬며시 녹아내린다. 뜨끈한 김치찌개에 쓱 녹아나는 버터처럼... 나누는 즐거움은 그렇게 맛있다.


코로나 19로 소통이 막히고 거리는 멀어지고 있지만, 마음은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 몸이 멀어지면 맘도 멀어진다는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인간인 지라 매일 만나 쌩글쌩글 웃던 사람들도 코로나의 위협 속에 희미하게 멀어졌다. 얼굴 한 번 보자는 소리도 조심스럽다. 밥 한 번 먹자는 소리는 입 밖에도 못 내민다. 보고 싶은 가족도 오히려 남보다 더 조심스럽다. 세상이 그야말로 요지경이다.


요지경 세상을 어찌할 것인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말은 아니어도, 만날 수 없고 밥 한 끼 함께 할 수 없다면, '잘 지내지, 조심조심 견뎌보자고... 감기 조심하고...' 한 줄 문자라도 안부를 나눠 보자. 내가 먼저...


우리는 일함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간다.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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