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A Conte #03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이야기
요즘 세상에는 ‘적당한' 연애가 유행하는 것 같다. 못생긴 신사는 추잡한 여인을 만나고, 비루한 처녀는 가난한 청년을 만난다. 마치 내가 가진 몸값의 총량을 저울에 재기라도 하듯 정확히 비슷한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다. 아무도 규칙을 설명해준 적은 없지만, 모두가 알고 있고 모두가 따르는 사랑의 규칙이다.
하지만 이야말로 뒤틀린 운명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로 못생긴 자들, 해소할 수 없는 결핍을 가진 이들이야 말로 아름다움의 가치를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이들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키가 150cm가 채 되지 않고, 등에는 괴상망측한 혹이 달린데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파리를 가득 채운 반반한 기생오라비 녀석들 모두를 합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섬세한 미감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건 오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의 결핍을 고민하고 타인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했던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역설적인 심미안이다.
아름다움과 나는 마치 등을 맞대고 누운 오랜 부부처럼 가깝고도 먼 사이다. 미를 향한 나의 끊임없는 구애는 늘 거절당했고, 축복인지 형벌인지, 나는 거절의 이유를 늘 정확히 알 만큼 현명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운명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살아왔다.
물론 나는 여전히 아름다움에 끌린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사랑하는 것은 경쾌한 태도, 과함이 없는 몸짓, 미묘한 표현을 담은 말투와 따뜻한 향기, 조금씩 밝아지는 미소와 입술, 봄날의 센강과 같이 푸른 눈빛이다.
S의 실제 이름은 마리 클레망틴이지만 나는 그녀를 알고부터는 쭉 S라고 부르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마리라니, 그녀의 섬세하고 솔직한 영혼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2년 전, 나는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 유명한 모델 마리 클레망틴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순간이었다. 카페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르누아르 그림 속의 풍만하고 복실복실한 장미빛 미녀가 아닌, 작고 앳되며 창백하지만 사람을 꿰뚫듯한 눈빛을 가진 열 여덟의 소녀였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충 인사를 한 나는 평소답지 않게 버벅대기까지 했다.
- 마리 클레망틴이 맞나요?
- …
- 미안해요, 소문과는 다르게 너무 어려보여서 내가 착각했나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그냥하는 뻔한 말, 의미없는 질문에는 잘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예의 그 깊은 눈으로 빤히 상대방을 쳐다봤고, 그런 침묵은 대개 상대방을 더욱 당황시켰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쩔쩔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 종국에는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까르르 웃고 마는, 나의 자학 개그에도 전혀 웃지 않았다. (‘술에 취해 넘어져도 저는 괜찮아요, 워낙 땅에 가까이 있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못마땅해 했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결국 나는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하던 말을 멈추고 와인을 홀짝였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 당신의 그림을 봤어요. 정확히는 스케치요,
- 그래요? 어땠나요?
- 당신은 진짜를 그릴 줄 알아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당신이 나를 그려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거절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를 그리기 시작했다. 서커스 곡마사였던 그녀는 드물게 몸을 자유롭게 쓸 줄 아는, 훌륭한 모델이었다. 게다가 (이 또한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어려서부터 공장, 상점을 전전하며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그녀는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힘든 시절은 대개 사람들을 각박하고 메마르게 만드는데 그녀는 그 시기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S는 최고의 피사체가 되어 주었다. 특히 그녀가 가끔 카페에 앉아 멍때리는 표정에는 그 특별한 영혼이 무방비상태로 드러나 생의 감동을 선사했다. 나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속도로 스케치를 하고는 했다.
그녀의 첫 초상화가 완성되고, 우리는 함께 축배를 들었다. 그녀는 르누아르가 그린 천사같은 모습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모습이 담긴 나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녀는 단순히 모델에 그치지 않고, 직접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파리의 가장 핫한 모델에서 촉망받는 신진 화가로 거듭났다. 그리고 나는 빛을 일어가던 마리 클레망틴에게 수잔 발라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다. 그리고 자신의 빛나는 재능을 키워갈 수 있도록, 무뚝뚝하지만 그림 하나는 제대로 가르치는 드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친애하는 동료이자 친구, 때로는 멘토일 뿐, 스스로를 그녀의 연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간혹 술에 취해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S와 나는 각자의 영혼 속에 숨어 있는 가장 내밀한 방을 열어보고, 매일 새롭게 서로를 발견했다.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졸음이 쏟아져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대화에 너무 깊게 빠져든 나머지 잠에 들 수 없었다.
S는 만인의 연인이라고 해도 될만큼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누군가의 거대한 응접실에, 카페에, 아틀리에에 들어가면 모두가 의식하게 되는 특별한 존재가 있다. S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일 뿐,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일어난 일은 정말 이상했다. S와 나는 일찌감치 만나 이른 저녁을 먹고 여느 때와 같이 센강을 걸었다. 나는 처음에는 최근 시도하고 있는 프린팅 기법을 설명하는데 완전히 집중해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S는 정신이 어디 딴데 가있는 듯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시큰둥해진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조용히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 앙리, 나는 더 기다릴 수 없어요
- 무엇을 말이오?
- 당신을요. 지난 2년동안 당신이 용기내어 다가오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어요. 당신, 언제 내게 프로포즈 할 건가요?
나는 아연실색했다. 프로포즈라니. ‘S에 따르면’ 그녀는 나를 지난 2년간 꾸준히 흠모해왔고, 우리가 연인, 나아가 부부가 되기를 고대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나에게 직접 용기를 냈다고, 그녀는 말했다. 늘 꿈꾸어 왔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숨이 막혔다. 나같은 난쟁이가 그녀의 손을 잡고 걷는 특권을 누린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맞지 않았다. 괴상한 그림이었다. 아, 그녀는 나를 불쌍하게 여긴 것이 틀림없어, 나는 생각했다. 나이트 클럽에서 주정뱅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고, 아버지마저 부끄러워 하는 물랑루즈의 화가, 창녀와도 같은 무희들에게 희롱당해 고통스러울 때도 농담으로 넘겨야 하는 나의 운명을… 나는 S의 사랑이 길거리의 거지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확신했고, 순간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만 그 분노의 대상은 내 앞에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 S가 아닌, 비참한 나의 운명이었다. 그녀의 말을 더 듣고 있다가는 나도 모르게 심한 말을 내뱉을 것 같아, 나는 빠르게 웅얼대듯 거절을 전하고 창백해진 S를 지나쳐 집으로 돌아왔다.
못생긴 이들이야말로 아름다움을 가질 마땅한 자격이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운명은 참으로 재미있고도 잔인해서 그러한 자격에는 코웃음을 치며 우리에게 행운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를 찾아온 것은 행운이 아니라, 동정이었다. 나는 나의 여신, 수잔 발라덩이 나와 같은 못난이와 함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나의 거절은 보잘 것 없는 나라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며, 가장 신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고민의 여지 없이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심하게도 ‘내 다리가 10cm만 길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센강을 절뚝대며 억지로 걷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었다면, 눈물을 숨긴 농담이 아닌 편안한 미소로 하루를 대할 수 있었다면, 그녀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마주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나에게 고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처음 본 날 이미 나는 사랑을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나는 나의 영혼을 이렇게 추하고 비루한 몸뚱아리에 숨겨놓은 신을 저주하며, 완벽하게 어울리는, 거리의 이름 모를 연인 한쌍을 질투하며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밤이었다.
⋇ 위 글은 프랑스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 Lautrec(1863-1901)과 수잔 발라동 Suzanne Valadon(1865-1938)의 일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and More..
- ‘물랑루즈의 화가’로 알려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12세기 부터 내려오는 프랑스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 그의 아버지는 백작 작위를 가지고 있었고, 사촌누이와 결혼합니다. 이러한 근친혼은 당시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때문에 앙리는 유전적인 결함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 선천적으로 뼈가 약했던 그는 두 번의 사고로 뼈가 부러진 이후에는 다리가 거의 자라지 않아 하반신이 과도하게 짧은 난쟁이의 모습으로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했습니다.
- 사냥과 승마를 즐기던 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창피해하며, 그의 사고 또한 승마, 즉 보다 남성적인 취미로 인한 것이라고 꾸며 둘러대기도 했습니다. 툴루즈의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지원한 것은 그의 어머니었습니다
- 수잔 발라동(마리 클레망틴)은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고작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양재사, 직공, 청소부 등 수 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험난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서커스의 곡예사를 꿈꾸었지만 부상으로 이마저도 불가능해진 후, 그녀는 우연히 화가의 눈에 띄어 모델이 됩니다.
- 특히 그녀는 르누아르 그림 속 모습으로 유명한데, 모델이자 내연녀였던 그녀는 르누아르의 약혼자에게 사이가 들통나 쫓겨나기도 합니다.
- 로트렉은 그녀의 재능을 알아봤습니다. 그는 마리에게 수잔 발라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화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전시회를 열어주기도 합니다.
- 수잔 발라동은 실제로 툴루즈 로트렉에게 프로포즈를 했으나, 거절당합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로트렉의 대답은 그대로였습니다.
- 툴루즈 로트렉이 수잔을 거절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의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가설, 독신주의자였다는 가설, 그리고 수잔 발라덩에게 매독이 옮은 그가 겁에 질려 거절했다는 가설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쏟은 툴루즈 로트렉의 애정을 고려했을 때, 본인의 장애와 늘 술에 취해있는 불완전한 삶의 방식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 그녀를 떠나고 몇년 후 로트렉은 매독과 알콜중독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 수잔 발라덩은 73세 몽마르뜨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끊임없는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녀의 자화상 속에는 강인한 자아와 삶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서로 다른 화가들이 그린 수잔 발라덩의 초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