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UA Aug 21. 2021

[향수도둑]

KUA Conte #07 : 앤디 워홀 Andy Warhol


나는 향수에 다소 미쳐있다.


공간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향수를 뿌리는 것이다.




나는 한가지 향수를 고집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은 한가지 향수를 석달 동안 내리 뿌리고 다시는 그 향수를 쓰지 않는 것이다. 그럼 다시 그 향을 맡았을 때 특정한 석달간의 기억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어떤 의미에서, 향수는 내 기억의 저장소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향기를 수집하는 것은 나의 가장 즐겁고도 은밀한 취미이다. 나는 파티에 초대되면 고양이처럼 조용히 화장실로 숨어 들어 그 집에서 어떤 향수를 쓰는지 탐색한다. 평소의 나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는 타입이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눈알을 굴린다.



향수함에 내가 이제껏 써보지 못한 희귀한 타입의 향기가 있는지, 혹은 내가 좋아하지만 잊고 지냈던 향수가 있는지 찾아보는 시간은 파티를 즐기는 나만의 방식이다. 때로 너무 독특한 향기를 찾으면 나는 그것을 찍어 바르고야 만다. 그리고 주인들이 눈치 챌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








근래 들어서는 이런 즐거움을 많이 느끼지 못했다. 너무 많은 향수를 접하다 보니 더이상 새로운 향기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 나는 그간의 실망을 모두 만회할 만큼 대단한 향수를 찾았다. 파티를 연 H 부부는 최근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이사 온 젊은 커플이었다. 남편은 증권사에서 일하고 있고, 아내는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언젠가 선생님이 제 그림을 한 번 봐주시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지만 나는 결코 취미 생활로 그리는 그림을 봐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대답을 피했다.




많은 이들이 파티를 찾은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화장실로 숨어들 수 있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부부의 느낌과 비슷하게 화장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의외인 것은 향수서랍이었다. 큰 기대 없이 열어본 서랍은 진귀하고 다양한 향수로 가득했다. 아마도 둘 중 하나가 향수를 모으는 것이 취미인 모양이었다. 마르셀 로샤스, 워스, 프린시 매차벨리, 뤼시앵 르 롱 같은 빈티지 향수부터 샤넬 no.5 같은 클래식, 최신 유행의 정점에 있는 딥티크까지, 서랍은 마치 작고 호화로운 향수 상점과도 같았다.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고 탐욕스럽게 향기를 음미하던 나는 이내 소박하지만 우아한 디자인의 한 향수에 눈길이 꽂혔다.




그 향수는 투명한 가운데 회색의 오로라가 씌워진 듯 오묘한 빛을 띄었다. 홀린 듯 병을 집어든 나는 이 향수가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특별하고 이국적이며, 강렬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아득해질만큼 아름다운 향기였다.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에 매료된 나는 조심스럽게 병을 이리저리 돌려 브랜드를 찾았다. 하지만 병에는 브랜드도, 아니 그 무엇도 적혀있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다. 이 향기를 갖지 못하면 안되는데! 나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마치 장난감을 뺏긴 6살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몇 분이나 지났을 까, 나는 향수를 위해 약간의 민망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파티의 주인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손님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함께 파티에 참석한 B에게 부탁해 주인 부부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 별 의미 없는 말을 몇마디 주고 받고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죄송하지만 화장실에서 우연히 향수서랍을 봤습니다. 여분의 손수건을 찾다가요, 마음대로 뒤져서 미안합니다.


- 죄송하긴요, 전혀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저희의 향수 컬렉션이 마음에 드셨나요? 아내가 향수를 워낙 좋아해서 몇년 동안 전세계를 여행하며 모았습니다.


- 훌륭한 컬렉션입니다! 탁월하다는 말이 어울려요. 저도 워낙 향수를 좋아해 많은 브랜드의 상품을 사모았지만 두 분의 반도 안되는 것 같아요.


- 선생도 향수를 좋아하시는군요, 어떤 향기가 마음에 드셨나요?


- 안 그래도 여쭤보고 싶었어요. 연한 회색을 띄는 투명한 향수요,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인데, 정말 멋지더군요. 저도 하나 사고 싶은데 이름이 쓰여있지 않아서요


- 후각이 정말 예민하시군요, 다른 화려한 병들 사이에 있으면 눈에 잘 띄지 않을텐데 말이에요! 그건 안타깝게도 구할 수 있는 향수가 아닙니다. 파리로 신혼여행 갔을 때 우연히 만난 조향사가 만들어줬어요. 아내의 이미지를 보고 직접 조합한 향기인데, 보신 것이 마지막 병입니다. 저희도 그 향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 다시 파리에 갔을 때 그 가게를 찾아갔는데 장소를 옮긴 건지 찾을 수 없더군요. 그의 이름도 기억 나지 않고, 제조법도 모르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껴가면서 조금씩 향기를 음미할 수 밖에요




나는 마치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더는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향수를 더욱 갖고 싶게 만들었다. 내 기색을 알아차린 B가 정중히 주인 부부에게 부탁했다.





- 저기, 무리한 부탁이겠습니다만 혹시 앤디에게 마지막 병을 선물해주실 수 없을까요? 아시잖아요, 예술가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는데, 앤디에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향기랍니다. 또 알아요? 이 향기로 인해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지! 그럼 두 분의 추억이 절대 없어지지 않는 작품으로 남을 수도 있는겁니다





예상대로 부부는 난색을 표했다. 신혼여행의 추억이 담긴 향기를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백번 이해했지만,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더는 파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 모든 것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내 생각은 여전히 그 집의 화장실 세번째 서랍, 은색의 날렵한 뚜껑이 달린 이름모를 그 향수에 집착해있었다.



날이 갈 수록 나는 그 향기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냄새란 참 얄궂은 것이, 맡을 때는 그 어떤 감각보다 강렬하지만 코 끝을 떠났을 때는 기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향기의 기억만이 코 끝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약속을 세개나 펑크냈을 때 나는 결심했다




‘향수를 훔치자'





일단 결심을 굳히고 나니 놀랍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남은 숙제는 H부부의 집에 다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나는 마치 007처럼 이 범죄 계획에 몰두했다. 그들이 뉴욕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파티를 자주 열지 않을 거라는 것이 문제였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향수를 훔쳐갔는지 유추할 수 없는 떠들썩한 파티와 그 파티에 초대받는 것이었다.




문득, 부부 중 아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나는 바로 그들의 번호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약 5분간 호들갑을 떨었다.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견디고, 나는 몇주 후 그녀가 뉴욕시의 아마추어 그림대회에 출품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나는 그 대회의 심사를 요청받은 차였다. 물론 단칼에 거절했었지만 다시 전화해 하겠다고 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 정말 재밌네요! 마침 제가 그 대회의 심사를 맡을 예정이랍니다. 작업실로 한번 가지고 오시죠


- 제 그림을 봐주신다구요? 정말 친절하시네요! 제가 상을 받으면 모두 깜짝 놀랄거에요!




깜짝 놀라는 것이 당연할,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녀는 상을 받았다. 수상이 별 의미 없는 아마추어 대회였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살롱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겨 대단히 기쁜 모양이었다. 결국, 계획대로 파티가 열렸다.




고심끝에 얻은 기회였지만 막상 파티날이 다가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는 얼굴이 여럿 보였지만 내가 찾는 것은 오로지 화장실의 향수 뿐이었다. 적당한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마티니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오오! 여전히 그 곳에서 향기의 여왕, 이름 모를 그 향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혹시 향수를 깨뜨리기라고 할까 너무 긴장되어 손을 벌벌 떨며 미리 준비한 두툼한 자켓 안 쪽에 실크로 된 손수건을 꺼내 향수를 두번 감쌌다. 나의 첫 도둑질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나머지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날씨가 많이 추워졌죠?’ 라는 질문에 ‘한 발로 뛰는 토끼를 본 적이 있답니다'와 같은 동문 서답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없이 파티장을 돌아다녔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 적어도 내가 도둑으로 지명될 확률은 낮아질테니.




집에 돌아와 미리 준비해둔 화장대의 가장 안쪽에 향수를 넣어두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병을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공기와 만나 향기가 변하거나 향수를 흘릴 것이 두려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침실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는 향기를 마음껏 음미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에 뿌리고 자는 동안 향기를 맡는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두고 잠을 청하면 다음날 아침 은은하게 주변을 감싸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내 머리카락이나 안경에 향기가 내려앉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마침내, 향수를 뿌리기로 했다. 여기저기 뿌리며 냄새를 소유하는 것은 할만큼 했고, 이제는 내 몸에서 하루 종일 향기를 음미하고 싶었다. 같은 향수라도, 향기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샤넬 no.5 를 뿌리면 굉장히 매스큘린한 향기가 되는데, 나는 이 것이 호르몬과 향수가 만나 일으키는 작용 때문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향수가 나를 만났을 때 어떤 향기가 될지, 확인할 준비가 되었다.




날짜는 신중하게 골랐다. H부부를 마주치면 단번에 이 진귀한 향을 알아챌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칠 확률이 낮은 날, 아주 가까운 친구들과 해변으로 가는 날 뿌리기로 했다. 햇살에 비춰 반짝이며 분사되는 향수를 나의 흰 셔츠 앞 뒤로 한번, 두번, 그리고 목 뒤에 한번, 두번 뿌렸다.




코로 탐욕스럽게 향기를 빨아들이는 순간, 나는 황홀경과 비슷한 느낌을 경험했다. 드디어 나는 향기를 완전히 가진 것이다! 나는 이대로 죽어도 아쉽지 않을만큼 흠뻑 향기에 취했다.




하지만 1초도 채 되지 않는 이 찰나의 황홀함이 지나가자 이상하게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날 밤, H부부의 화장실로 돌아간 것 같았다. 술취한 사람처럼 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파티장을 전전하던 그날의 긴장감이 그대로 떠오르며 머릿속부터 땀이 줄줄 흘러 배어나왔다. 향기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땀냄새와 뒤범벅이 된 향수는 햇볕에 오래 둔 햄버거와 같은 큼큼하고 더러운 체취로 변모했다. 계속 이 냄새를 맡았다가는 구역질을 할 것 같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화장실 문을 여는 동시에 구토를 시작한 나는 옷을 입은채로 샤워기를 뿌렸다.




10분 후, 아주 미미한 잔향을 빼고는 모두 씻겨 내려갔다. 나는 마치 오염된 독극물이라도 묻은 양 씻고 또 씻었다. 입고 있던 셔츠는 그대로 벽난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향수를 가지고 놀던 몇 달 동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던 그 향은 나를 만나는 순간 끔찍한 악취가 되어버렸다. 도둑질의 댓가구나, 나는 생각했다.




다시는 그 공황장애와도 같은 순간을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충격적인 냄새는 다시 시도할 의욕마저 지워버렸다. 몇 달 동안 여기저기 뿌리는 바람에 1/3 정도가 없어졌지만 향수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다음날 바로 익명의 소포로 H부부에게 향수를 돌려보냈다. 벨벳 박스에 예쁘게 담은 향수는 그들의 문 앞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범인이 나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나중에야 들었지만 그들은 교양인인지라, 이 후에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나는 파티에서 더는 향수함을 찾지 않았다.










⋇ 위 글은 앤디워홀의 작품과 삶을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KUA Conte 는 쿠도스 아틀리에에서 발행하는 단편입니다

⋇ And More...


- 앤디워홀은 실제로 향수를 훔친 적은 없습니다. (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 향수를 훔친 적은 없지만 그는 굉장한 향수 애호가였습니다.

- 앤디는 유명해지기 전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습니다. 그는 제약회사의 광고로 상을 타기도 했지만, 정작 그가 유명해진 분야는 패션과 화장품 일러스트였습니다.

- 그는 하퍼스 바자의 수 많은 향수 일러스트를 그리기도 했습니다(하단에 소개)

- 앤디 워홀은 살바도르 달리와 재스퍼 존스에 이어 럭셔리 백화점 Bonwit Teller의 쇼윈도 장식을 맡았습니다. Bonwit Teller는 앤디에게 Arpege, Miss Dior, MaGriffe, Replique, Mistigri와 같은 인기있는 향수들의 프로모션을 맡겼고, 고객들은 쇼윈도 장식의 디테일에서 워홀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업물은 안타깝게도 유실되었지만 사진으로는 남아있습니다.

- 그는 실제로 파티장에 가서 향수를 찾아보고 맡아보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가끔 뿌려보고 싶은 향수가 있으면 그 것을 몰래 뿌리고 파티장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앤디워홀의 철학' 참고)

- 한가지 향수를 석 달씩 뿌리고 이 후 절대 뿌리지 않는 것은 시간을 향기로 수집하는 그 만의 방식이었습니다

- 그는 굉장히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냄새를 감지하고는 했습니다. 그는 음식 냄새부터 껌, 나무, 구두닦이대, 방망이와 같은 사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냄새를 분류하기를 즐겼습니다

- 올해 출시 100주년을 맞이한 샤넬 no.5는 앤디가 사랑한 클래식 향입니다. 그는 샤넬 no.5의 연작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고, 이는 그의 사후에 쁘렝땅 백화점 샤넬 포스터로 쓰이기도 합니다.






















앤디워홀, 폴라로이드 향수 사진(1979)











앤디워홀, 하퍼스 바자(1955)












앤디워홀,  라거펠드, 할스톤, 샤넬 향수 일러스트










앤디워홀, Andy Warhol + Marilyn Monroe + Chanel no 5 = Art + Fame + Success











앤디워홀, 향수 일러스트와 사진







앤디워홀, 샤넬 no.5 연작









앤디워홀, <Miss.Dior>





앤디워홀, Bonwit Teller 광고 스케치







앤디워홀, 꽃과 장갑(1955)







앤디워홀, 향수병








앤디워홀, 향수병과 립스틱






앤디워홀, Replique 향수 광고









젊은 시절의 앤디워홀








이전 06화 [망나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