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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A Sep 05. 2021

[팔로마 Paloma]

KUA Conte #08: 파블로 피카소 이야기


나는 공산당원이다.


전쟁이 끔찍하게도 싫었던 나는 연합군이 파리에서 나치를 밀어낸 그 해, 당에 입당했다. 공산당은 내 유명세를 이용해 당 선전을 하고자 기관지에 내 이름을 대서특필했지만, 나는 누구처럼 제 몸을 단에 세우고 침을 튀겨가며 당의 이념을 전파하는 활동따위는 하지 않았고, 내가 생각하는 전쟁의 실상과 생각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기에 실제 내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스튜디오에서 벗어나 봄의 냄새를 맡으며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가 한 노천카페에서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G를 발견했다.내 그림에 특히나 관심을 보이며 공산당에 입당할 때도 많은 의견과 도움을 주던 그다.




- 너무 오래간만에 뵙는 것 같아요. 잘 지내셨나요? 최근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는지요?



- 긴 겨울 같던 전쟁도 끝나가고 지금 날씨처럼 세상에도 정말 봄이 오나 봅니다. 요즘은 그리스에 그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어요. 빌어먹을 나치 놈들에게 저항한 그리스 사람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그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려고 10년 전에 그린 그림 중 하나를 보내려고요.



- 그리스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좋은 기운을 받았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우리 당에도 이제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그림이 필요해요.



- 무슨 말씀이신지?



- 다음 달에 프랑스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립니다. 우리 당이 주최하는 거죠. 이 회의를 대표하는 포스터를 파블로씨가 그려주셨으면 해서 뵙자고 했어요.



- 세계평화회의라…


<여인의 머리>,1939 

G는 이어서 다른 당원들의 이야기와 그가 준비하는 평화회의에 대한 이야기,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전 같으면 그가 내놓는 주제에 내 생각을 맘껏 피력하며 의견을 나눴을 법도 한데, 포스터 작업에 대한 막연함이 머릿속에 맴돌아 대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무엇을 그려야 할까’

‘무엇이 평화를 상징할까?’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이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전쟁’, ‘대립’과 ‘폭력’ 이 있는 많은 그림을 그렸다. 나치가 물러나니 사람들은 내 그림을 극찬했다. 하지만 ‘평화’는 또 다른 이야기 아닌가?


<게르니카>, 1937



집에 돌아와 나의 아내, 프랑수아즈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 프랑수아즈, 공산당에서 세계평화회의를 대표할 포스터를 그려달라고 내게 요청했어. 그런데 요청 이후에 평화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어. 결국 ‘평화'에 대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무엇이 평화를 상징하는 것일까? 평화라는 것이 실존하기는 하나?’ 그런 생각들 말이야. 포스터 완성 시간까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더 조바심이 나서 그러는 걸까?



아이를 품은 만삭의 배를 어루만지며 내 이야기를 듣던 프랑수아즈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 오, 파블로. 모두에게 평화의 상징물은 다르게 다가올 수 있어요. 난 우리 아들과 지금 내 뱃속에 품고 있는 아이가 내게 온전한 평화를 주지만, 누군가에게 아이들은 성가신 존재나 짐이 될 때도 있죠. 그저 당신이 평화로 표현코자 하는 것을 그려봐요. 전쟁 없던 시기, 당신이 스페인에 있을 땐 무엇이 평화였나요?




며칠이 지났다. 세계평화회의 포스터에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붓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프랑수아즈와 나눈 대화를 더듬어 그 옛날을 떠올려보았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전쟁이 없던, 스페인의 어린 내 시절. 그 시절의 대부분 기억은 스페인 말라가의 우리 집 2층에서 내려다보이던 광장과 내게 붓을 쥐여준 아버지다. 알록달록한 건물을 배경으로 광장에서 뛰어다니던 아이들,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던 어른들, 광장 둘레에 심어진 나뭇 가지에 앉아있던 비둘기들이 생각난다. 당시의 나는 아버지가 쥐여준 붓과 물감으로 삼삼오오 모여든 비둘기를 자주 그리곤 했다. 아버지 말에 따르면 나는 아주 어린 시절 비둘기의 발을 보며 연필이라고 했을 정도로 비둘기와 가까이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가 9세 때 그린 비둘기 



피카소의 10세 그림 


그래, 맞다. 비둘기가 있었다.



비둘기는 성경에도 등장한다. 
대홍수가 끝나고 물이 말랐는지 확인하기 위해 노아가 날려 보낸 비둘기.

며칠 뒤 올리브 잎을 입에 물어 들고 다시 돌아온, 만인이 아는 그 비둘기가 있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었고 ….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음으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다.

성경 창세기 8장 ‘홍수가 그치다.' 중



새로운 소식과 희망을 품어다 준 성경의 비둘기와 달리, 내가 어릴 적 아버지가 집에서 키우던 비둘기는 어린 새를 무차별하게 공격해 죽이기도 했다. 죽은 어린 새의 모습은 처참했고, 어린 나는 그 끔찍함에 충격을 받아 아버지의 비둘기를 며칠은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노아에게, 그리고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비친 비둘기의 이면을 본 것일 수도 있다.




‘평화’라는 단어를 다시 곱씹어보면 이면에는 ‘폭력', 즉 ‘전쟁’이 존재한다.


평화는 전쟁이 있으면 깨지고, 전쟁이 없으면 유지된다.


이 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 아닌가?



그래, 비둘기를 그려야겠다.


아주 하얀 비둘기를 그려야겠다.


피카소의 그림이 담긴 세계평화회의 포스터 1949 






⋇ 위 글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과 삶을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KUA about




-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의 항구 도시인 말라가에서 공립 미술학교 교사인 부친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와 모친 마리아 피카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세까지 스페인에서 미술을 배웠으며, 이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살며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 그는 입체주의 미술양식의 창시자로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넘나들며 작품을 제작하던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현재에도 많은 미술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 “예술가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파괴적이거나 결정적인 사건, 혹은 가슴 훈훈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살고,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형성해가는 정치적 존재다.” 라 말한 그는, 그의 그림이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인류애를 표방하는 공격무기로 사용되길 원했습니다.



- 나치는 그를 타락한 예술가라고 비난했고, 예술성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을 ‘퇴폐미술'로 낙인찍었지만, 그런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그림들 때문에 전쟁 이후 더 유명해진 계기가 됐습니다.



-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서 스페인 내란으로 인한 폭격으로 약 2천 명이 사망한 사건의 소식을 접하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게르니카>를 1937년에 그려냈습니다.



- 피카소는 1944년 연합군이 파리에서 승리하고 나치가 후퇴하는 해, 1944년에 공산당에 가입해 당원이 되었습니다.



- 피카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한 그리스 국민이 보여준 저항에 경의를 표하고자 1939년 작품인 <여자의 머리>를 1949년 그리스에 기증합니다.



- 1949년 4월에 공산당이 주최한 프랑스의 세계평화회의 포스터는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가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때부터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가 다수 쓰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포스터 그림 이전에도 그는 다수의 그림에 비둘기를 표현했으며, 이후에도 다양한 그림에서 비둘기를 등장시켰습니다.



- 1949년 4월에는 당시 파블로는 아내이던 프랑수아즈 질로 사이에서 딸, 팔로마 피카소를 품에 얻게 됩니다. 팔로마(Paloma)는 스페인어로 비둘기라는 뜻으로 그의 가정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며 딸에게 이를 이름으로 지어줍니다.










<비둘기를 안은 아이>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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