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제주 여행을 다시 준비하면서 제주 TV의 올레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아주 인상 깊게 들었던 말이다.
현지의 역사, 문화, 자연에 대해 알면 알수록 여행지에 마주치는 평범한 벽돌 한 장, 돌멩이 하나에서도. 왜 이곳 사람들은 벽돌을 저런 재료로 저렇게 만들어내는지 이곳의 돌멩이 들은 왜 저렇게 생겼는지 이유를 알면 모든 게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관광객이 그냥 지나치는 장면에서도 의미를 느끼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이 여행자의 자세이고, 그것이 여행의 또 다른 재미가 아니겠는가. 그런 재미가 없으면 바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똑같은 제주를 일 년에도 몇 번씩이나 다니겠는가.
물론 제주는 풍경 속으로만 들어가기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세상의 어느 곳이나 같은 이치겠지만 , 같은 장소라도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제주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비가 오는 사려니 숲과, 눈이 쌓인 사려니 숲, 맑은 날의 사려니 숲은 여기가 같은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서로 다른 신비한 느낌을 준다.
비가 오는 사려니숲은 "신성한 숲"이라는 고유의 이름과 어울리게 몽환적이고 신비한 느낌을 준다. 눈이 하얗게 내린 사려니 숲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닐까. 심지어 나는 아직 단풍이 든 사려니 숲을 보지 못했고 봄에 새순이 올라오고 꽃이 피는 사려니숲을 아직 보지 못했으니 제주를 최소한 봄과 가을에 두 번 더 갈 핑계가 생겼으니 매우 신나는 일이다. 아래의 사진에 봄 꽃 피는 모습과, 단풍이 알록달록 올라오는 사진을 언젠가는 추가하려고 한다.
눈 오는 사려니 숲
(좌) 비가 갠 사려니 숲 (우) 초겨울의 사려니 숲
비오는 사려니숲
또 제주 전체를 보더라도 계절에 따라 봄이 되면 유채, 매화, 동백꽃이 흐드러지고, 봄이 무르익고 여름이 오기 전 한라산 영실에는 철쭉과 진달래가 붉게 피어오른다. 또 초여름이 되면 수국이 여기저기 뭉게뭉게 피어올라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남국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여행자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여름에는 실록이 우거지면서 제주도의 푸른 밤바다를 느낄 수 있고(물론 익어가는 더위도 느낄 수 있다) 날이 뜨거워져야 자전거 여행으로 지친 여행객에게, 만장굴이 피서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을이 되면 단풍이 한라산을 수놓고 은빛 억새가 겨우내 제도의 오름을 은빛 세상으로 물들인다. 한라산 설경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계절 따라 다른 만큼 제주도의 지역마다 특징이 전혀 다른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 섬은 일단 남북으로 짧고 동서로 길다. 화산이 폭발할 때 남북으로 퍼진 라바는 점성이 강해서 넓게 퍼지지 않았고, 동서로 퍼진 라바의 경우 점성이 약해서 넓게 펴진 것이다.(고추장처럼 점성이 강한 라바와 묽은 죽처럼 점성이 약한 라바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그러다 보니 동쪽과 서쪽에 화산 동굴, 곶자왈과 같은 화산지형이 많이 발달한다.
대표적인 화산지형 중의 하나인 화산 동굴은 라바가 해안을 향해 강처럼 흐르다가 공기와 맞닿은 천장 부분부터 굳어서 생긴다. 그래서 만장굴과 거문오름과 같은 화산지형들이 동쪽에 위치해있고, 그렇게 생긴 화산 동굴의 천장이 무너지고 깨지면서 생긴 암석지대인 곶자왈도 동쪽과 서쪽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렇게 넓게 퍼진 용암 덕분에 서쪽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지금도 그 평야에서 각종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제주도 모형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 촬영)
동쪽의 경우 오름도 많고 평야도 제법 있지만 땅이 비옥하지 못해 약간의 밭작물을 재배하긴 해도 해녀들의 물질과 같은 어업이 비교적 많이 발달하게 된다.
남쪽과 북쪽은 똑같이 경사가 비교적 급하지만 남쪽의 경우 약간의 융기가 이루어지면서 땅이 솟아 올라 몇 개의 폭포가 만들어지게 된다. 정방폭포, 천제연폭포, 천지연폭포 같은 유명한 폭포들이 북쪽에는 없고, 남쪽에 만들어진 이유도 지반이 살짝 융기하면서 해안가의 용천수가 바다로 수직낙하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지나가면 그냥 "서귀포에 가면 폭포가 있구나" 겠지만 알면 흥미로운 사실이고, 같이 여행 간 사람에게 아는 척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얘기다. 다만 스마트폰의 발달과 함께 이런 아는 척은 조심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바로 소위 팩트체크가 가능하기 때문에 망신을 당할 수가 있다.
이런 남북과 동서의 경사도 차이를 하루 만에 실감 나게 체감하고 싶다면 한라산을 오르면 된다.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을 오르는 두 가지 유명한 코스가 있다. 하나는 성판악코스이고 하나는 관음사 코스인데, 관음사는 한라산 북쪽 사면에서 출발이고 성판악은 한라산 동쪽 사면에서 출발한다. 동쪽과 북쪽 중 한쪽으로 올라간 뒤 반대쪽으로 내려오면 그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관음사 쪽은 가파른 경사와 함께 화산이 만들어낸 기암괴석 지형들을 맛볼 수 있는 동시에 쉽지 않은 난이도를 자랑하지만, 성판악 쪽은 완만한 경사로를 끝없이 펼쳐져서 살짝은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물론 이건 내가 성판악으로 내려왔으니까 하는 얘기지 성판악으로 등반을 했으면 다른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장장 다섯 시간 이상을 등반해야 하는데 지루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또 남쪽과 북쪽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특산품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귤일 것이다. 그런데 보통 서귀포 감귤이 유명하지 다른 곳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물론 있을 수도 있다. 설명을 하기 위한 약간의 과장이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북쪽에서는 거의 귤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겨울에는 부는 북서풍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북쪽의 귤을 시고 맛이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일조량도 한라산 남쪽에 비해 많이 부족할 듯하고 날도 추울 것이다. 1118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한라산 북쪽 사면에는 귤밭이 거의 없고 일반적이 밭이 있는 반면에 남쪽으로 넘어가는 순간 황금색 귤밭이 한라산 중턱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한라산 서쪽에도 많은 밭이 있지만 그곳에는 주로 밭작물이 재배된다. 현무암의 특성상 배수가 잘되기 때문에 물을 가둬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논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찾기가 어렵다(논농사를 짓는 지역이 서귀포에 가면 있는데 이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글을 쓰려고 한다). 한라산 남쪽은 넓은 평야보다는 조금 경사가 있는 구릉지대이다 보니 밭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할 수 없고 귤나무를 재배하지 않았을까 싶다. 육지에서도 과수원은 완전 평야지대보다는 경사가 있는 구릉지대에 발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나의 n 번째의 제주 여행에서는 제주 청보리가 넘실대는 가파도와 함께 서남쪽의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와 함께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남긴 전쟁의 상처들을 보고 싶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자세하게 다루려고 한다.) 그런데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가 되기 위해 이것저것 책을 읽다가 「문경수의 제주 과학 탐험」이라는 책을 읽게 된다. 이 책은 나의 이번 제주여행의 테마를 완전히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제주에 대한 나의 인식에 아주 큰 이정표를 만들어 낸다.
지금까지 나는 제주를 역사적으로 바라보았지만 한 번도 과학적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전형적인 문과생의 뇌구조를 가진 나의 한계라고 변명하고자 하지만 요새 같은 과학과 인문학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대에 아니 될 말이긴 하다).
누구나 알지만 간과하는 사실 중의 하나가 제주도는 화산섬이라는 사실이다. 용암이 분출해서 바다 한가운데 만들어진 섬이고 섬 곳곳이 화산지형으로 가득 차 있다. 제주도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자연유산이 된 것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잠깐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제주는 화산활동으로 지금의 제주의 모습을 만들어 왔다. 나는 제주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하면서 이런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나의 심정은 아주 상투적인 표현으로 목욕탕에 들어갔던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이었다. 유레카!
이 책의 저자의 눈에 제주도는 말 그대로 화산섬이고 살아있는 박물관 같은 곳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유적지에 가서 벽돌조 각하나 기와 조각 하나에 희열을 느끼고, 관광객들이 제주도에 와서 에메랄드빛 바다와 아름다운 유채꽃에 감탄하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수월봉의 엉알 해안 절벽에 새겨진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역사를 보고 감탄한다.
이 책을 읽고는 나의 이번 여행이 3박 4일에서 4박 5일로 늘어나고 가파도를 포기하고 화산지형을 찾아 나서는 여행으로 방향을 바꾼다. 제주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인 민속자연사 박물관, 이름은 많이 들었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곶자왈과 그중 하나인 동백동산 습지, 그저 수많은 오름 중 하나인 줄 알았던 거문오름, 교과서에 많아 나와서 익숙하지만 본적은 15년도 넘었고 어찌 보면 너무 많이 듣는 단어라 지나쳐 버렸던 주상절리, 일몰이 예쁜 곳으로만 알고 있던 수월봉 등 제주의 화산 지형을 찾아 나서는 흥미진진한 여행을 떠나 볼 수 있게 되었다.
한없이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질 때
매번 가는 곳이라도 기분이나 날씨 등에 따라 전혀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일상에서도 매일 같은 방향으로 가던 길은 반대로 가보면 전혀 색다른 풍경이 느껴지기도 하고, 매일 운전해서 가던 길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면 운전을 하느라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풍경이 느껴지기도 한다.
일 년에 몇 번씩 내리던 제주공항이지만 항상 공항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해외여행을 가면 긴 비행 끝에 완전히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공항을 마주하지만, 제주는 한 시간 남짓의 비행으로 금방 도착하고 대부분 한국사람들이 많이 타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한 번은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 가 있는 법이다. 제주공항은 바다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내려 바다 쪽을 바라보면 시야가 뻥 뚫려 있고, 아래의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저 멀리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남국의 파란 하늘도 아니었는데 이날은 흐린 하늘 속 저 멀리 바다의 풍경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 말은 곧 진짜 여행을 온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같은 제주에서 매번 새로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