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숙제 검사를 해주기 위해서는 도장이 필요하다. 내가 검사할 때 쓰는 도장에는 발바닥 모양과 ‘000 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도장이 내 이름을 찍어주는 일을 한지는 올해가 4년째다. 앞 3년간 6학년 아이들에게 찍어주었을 때는 내 도장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줄 몰랐는데 올해 2학년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알림장을 다 쓴 아이들은 도장을 받고 싶은 자리에 발바닥 도장 모양을 미리 그려놓는다. 어떤 아이는 고양이를 미리 그려놓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놓고 중간에 도장 찍을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놓기도 한다. 글자도 000인, 고양이인, 발바닥인 이렇게 마음가는대로 잔뜩 써 놓고.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재미를 붙인 몇몇 아이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변형된 도장판을 그려놓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도장을 본인들이 딱 원하는 위치에, 찐하게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건을 워낙 잘 잃어버리는 나는 발바닥 도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알림장 검사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도장이 없었던 어느 날 아이들에게 “얘들아! 발바닥 도장이 없어 졌어요!!!”라고 외쳤고, 아이들은 “아!!! 발바닥 도장!!!!!” 하면서 다 같이 슬퍼했다. 급한 대로 도장 대신에 확인했다는 사인으로 별을 그려주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아이들은 별을 그릴 칸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도 점점 진화해서 칸을 여러 가지 다양하게 그려놓고 나에게 선택해서 그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엄청 크게 그려 놓고 왕별을 그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왕별 그려주면 그거 하나로 얼마나 흐뭇해하는지. 그림솜씨가 있는 여자아이 하나는 매일매일 다른 캐릭터가 양손에 별통을 들고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얼마나 정성껏 그려놓는지 별통에 별을 대충 그려 넣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부모님께서 카카오톡으로 도장 사진을 하나 보내셨다. 선생님 도장 잃어버리셨다고 해서 아는 분한테 부탁해서 하나 파셨다고 아이들 편에 보내주시겠다고 했다. ‘00초등학교, 000’ 라는 글자와 책 그림이 그려진 도장이었다. 안 받자니 이름이 새겨져 있고 해서 일단 받기는 했는데 김영란법 때문에 영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아이들이 워낙 도장에 관심이 많다 보니 받아 놓고 내가 샀다고 거짓말하기도 뭐하고. 주변에 여쭤보니 그럼 도장 값을 보내드리고 네가 구매한 것으로 하라고 하셨다. 도장을 주신 어머니께 마음은 감사하지만 세상이 무서워서 제가 어머니께 구입 하는 것으로 하겠다고 돈을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괜히 곤란하게 해드린 것 같다고 미안해하시다가 선생님이 첫 구매자시네요 하면서 돈을 잘 전해드리겠다고 하셨다. 작은 호의도 함부로 주고받으면 안 되는 세상인지라 처음엔 도장을 받고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래저래 잘 해결되고 나니 새 도장이 생겨서 참 좋다. (2017.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