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많은 선생님들이 나를 어려워하셨다. 정확하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묘하게 선생님이 내 눈치를 살피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우리 엄마는 치마바람이 센 분도 아니었고, 나 역시 초등학교 6학년정도부터는 선생님 칭찬받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 시크한 축에 드는 아이였다.
그런데 같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혼나지 않거나 남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해낸 것 같은데 과한 칭찬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편애’가 그분들이 나를 어려워하시기에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올해, 나를 어려워하셨던 그 선생님들의 느낌을 알 수 있게 해 준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책을 좋아하고 생각이 깊다. 글쓰기 한 것을 보면 수다스럽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 나름대로 전체의 구조를 가지고 생각을 펼쳐낸다. 그림도 곧잘 그리는데 묘하게 그림에서도 생각이 느껴진다. 한 마디로 어른스럽다.
속으로 ‘인문학적인 아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아이가 집중해서 나를 바라보고 수업을 들으면 진짜 긴장이 된다. 애들 가운데 어른 한 명이 앉아 있는 느낌이다. 학창 시절의 나는 이 아이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나를 어려워하셨던 선생님들은 나에게서 이 아이 같이 애어른의 기운을 느끼셨기 때문에 그러시지 않았을까 싶다.
교사인 내가 이 아이가 어려우니 다른 아이들은 오죽할까. 그래도 아이들이니까 조금만 노력을 하면 쉽게 친해질 수 있을 텐데 1학기 때 이 아이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쉬는 시간이면 책을 펴고 읽고 있는 그 아이에게서 나는 또다시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을 보았다.
전학 오기 전에는 늘 뛰어다니며 노는 것이 일이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전학을 가서는 “같이 놀자.”는 한 마디가 너무 어려워서 쉬는 시간에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나는 ‘쉬는 시간에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고 친해진 친구들도 나에게는 함께 놀러 나가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9월 초에 우리 반의 ‘인문학적 아이’를 불러놓고 나는 지금도 내가 왜 그때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나도 같이 나가 놀자.”는 말 한마디를 못했는지가 너무 후회스럽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너도 혹시 나처럼 용기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이라면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게 아니고 진짜 책 읽기가 좋은 것이면 괜히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워낙 말이 없고 눈빛이 어른스러워서 이런 말을 하면서도 참 조심스러웠는데 나와 이야기하고 며칠 후부터 아이가 책을 내려놓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교실에서 목소리를 들을 일이 없는 아이였는데 점점 더 많이 웃고 떠들고. 점점 더 많은 친구들과 서슴없이 어울린다.
그리고 그 아이의 그 모습을 보면 난 괜히 아쉬움이 남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다. 그 아이가 참 고맙다. (201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