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달린다.
인생은 단 하나의 이유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소한 차이가 삶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간다. 다만 아이들은 그 방향을 제어할 능력이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이들이 붙잡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곤 한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무력감 속에서 그저 얼빠진 얼굴로 지켜볼 때가 많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 결국은 멈출 수 없는 미친 질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 아이들도 그걸 안다.
“그냥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어요, 그냥 눈 감고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위협이기도 하고 다짐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향한 최면처럼 반복된다.
그런말들이 내 안에 차곡히 쌓인 한 주가 끝나면 난 교회에 나간다.
언제나처럼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나도 평온하다. 다른 세상 같다.
저 안에 들어가면 구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곧 현실의 무게가 밀려와 그 모든 게 불가능할 것 같아 눈물이 난다.
아이들의 얼굴이 한 명씩 스쳐가며 마음이 혼잡스러워진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닐까 하고 속으로 묻는다.
탈색한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와 뒷모습만 보면 여아 같던 열한 살 아이가 있었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던 눈빛은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관망.
그리고 서늘한 기운.
나는 성인에게서도 좀처럼 보지 못한 눈빛을 그 쪼끄만 얼굴에서 본다.
그 아이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지적장애 어머니 사이에서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누나와 함께 가출했다. 거리에서 범죄를 저지르다 붙잡혔고, 누나는 형사처벌을 받아 따로 분리되었으며 나이가 어린 동생만 우리 학교 인근 기관으로 넘어왔다.
나는 방과 후에 지역 복지시설이나 아동센터와 연계해 보려고 부단히 뛰어다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정말 안타깝지만, 저흰 다른 아이들도 보호해야 해요. 다른 아이들이 물들 수 있어요.”
남겨진 법원 서류와 탈색한 머리만 봐도 그들의 거부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안타까움에 2년 가까이 그 아이를 혼자 붙들고 프로그램을 꾸려갔다. 동물상담, 보드게임, 체육활동, 음악 프로그램… 도움이 될 만하다 싶은 건 뭐든 함께했다. 사실 전교의 50명이 넘는 교육복지대상 아이들을 함께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단 한 명을 이렇게 집중하는 건 내게도 벅찼다. 다른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아들의 얼굴이 겹쳐져 더 짠하고, 딱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이의 탈색한 머리를 다시 검게 물들이고, 스포츠머리로 짧게 깎아주고, 뚫었던 귀도 막으며 함께 변해갔다. 신기할 정도로 여전히 눈빛은 싸늘했지만 간간이 고개 숙여 피식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 어떻게든 웃기고 싶었다.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은 심리상담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일상 속에서 피식 웃을 수 있는 작은 순간들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작은 즐거움이 쌓여야 삶은 움직 일 수 있다.
졸업할 무렵 아이는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그러나 일상의 인간관계 속 사인을 눈치채는 감각은 여전히 서툴렀다. 어느 날 아이는 내게 항의하듯 물었다.
“왜 여자애들은 게임할 때 열심히 안 하고 자꾸 몸을 꼬고 이상한 소리만 내요?”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잘생겼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멋진 오빠와 함께 게임을 하며 여자아이들이 부끄러움에 몸을 비트는 것도 그저 “게임을 대충 한다”는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순진함. 그의 사춘기는 몸만큼 마음이 자라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상급학교에 진학한 뒤 아이는 전교부회장까지 하며 눈에 띄게 달라졌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소문과 함께 밀려왔다. 그런데 당선되고 두 달 뒤 그의 누나가 세상을 떠났다 소도 전해졌. 원래 어른이 되면 누나와 함께 살겠다고 했는데 그 꿈은 허무하게 끊겼다.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물놀이철도 아니었는데, 익사로 판정됐다. 기사 한 줄 나오지 않는 청소년의 비극을 보며 나는 씁쓸한 현실을 다시 확인했다.
삶의 역동 속에서 소멸의 충동과 생의 본능이 뒤섞인다. 결핍은 단순히 무언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아이들의 눈빛에 빈자리를 남기고, 몸짓에 새겨지고, 삶의 선택에 파문처럼 번진다. 어떤 아이는 그 결핍을 웃음으로 버티고, 또 어떤 아이는 벽처럼 굳어선다. 나는 그 속에서 어떻게든 웃음을 건네려 애쓰지만, 종종 실패한다. 삶은 늘 조롱처럼 나를 비껴간다.
그럼에도 웃을 일 없던 아이가 피식 웃는 순간, 세상 제일 비싼 보약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 사실 나라고 다르랴. 매일같이 ‘이 일 그만둘까’ 중얼거리다가도, 애들 한번 웃는 거 보면 또 버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거창한 소명의식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애들 웃기는 재미에 여기까지 밀려온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한 주가 끝나면 다시 나는 교회에 간다. 목사님의 설교는 참 평온하고 좋다. 마치 이곳은 다른 세상이다. 저 말씀 안에 들어가면 진짜 우리 아이들에게도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스친다. 그러나 곧 현실의 조롱같은 무게가 느껴진다.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가며 마음이 혼잡해진다. 나는 속으로 다시 중얼거린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어떤 아이들은 결핍 속에서 마음이 무너져
모든 걸 멈추고 싶은 마음과 버티고 싶은 마음 사이를 달립니다.
그 옆에서 어떻게든 살게 해보려 애쓰지만,
또 다시 비극의 소식을 듣곤 합니다.
끝을 향한 욕망과 생을 향한 본능 사이에서,
당신은 어느 쪽으로 더 기울며 살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