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없이 자라나는 법

자라긴 한다 비틀려서.

by 다나






왜 어떤 아이들은 신발끈을 묶지 못할까?


단순하고 쉬워보이지만 고학년이 되도록 못하는 아이들도 요즘에는 꽤 된다.
더 나아가 머리를 감는 법, 밥 먹는 법. 간단해 보이지만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영 서툰 채로 자라기도 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보호받지 못한 아이의 삶에 남은 공백의 흔적들이다. 너무나도 당연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자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일상의 행위들. 그것들이 삶의 구멍으로 자리해 아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


유년 시절의 결핍은 삶을 송두리째 비틀어버리는 기제다. 그리고 그 결핍을 안겨준 행위 주체는 절대적으로 부모이다. 그래서 이 트라우마는 다른 어떤 상처보다 개인적이고 특수해 참으로 벗어나기 어렵다. 일상에 스며 있어 무엇이 생살이고 무엇이 상처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부모와 물리적·시간적으로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 이상―죽음, 절연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혈연은 영구적인 관계로 남는다. 그래서 결핍은 과거형은 당연하고 현재진행뿐 아니라 미래진행으로 이어진다.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이들을 지치게 하고 결국 포기하게 만든다. 결핍을 스스로 이겨낸 사람은 행운을 얻은 것이지 단순히 강해서가 아니다. 그렇기에 넘어서지 못한 이들 역시 나약하다 탓 할 수가 없다. 부모라는 존재가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열심히 살면 이겨낼 수 있다 단정한다. 마치 “너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 갈 수 있어”라며 그 길에 닿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처럼. 하지만 아픔의 무게와 깊이는 지독하게도 개별적이다. 결핍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 아이의 잘못일 수는 없다.



비열한 어른들의 거래에 이용된 아이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부터 위험한 만남에 노출되기 시작해, 발로 찾아다녀야만 했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은 “걔 담배 펴서, 엄마가 어울리지 말래요.”라 말했다. 어린 남자아이들은 “그 누나 무서워요.” 하며 피했다. 학교에 연지가 등장하면 아이들은 홍해의 기적처럼 갈라지곤 했다.


아이가 고학년에 접어들 무렵 결국 정신건강의학과 병동에 입원했다. 아무리 붙잡아도, 내 자식이 아닌 이상 새벽마다 뛰쳐나가 반복되는 그 위험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사실 초등학생이 입원까지 간다는 건, 이 아이의 안전망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이다. 소아정신과 병상 중 초등학생을 받아주는 곳은 희소하다. 웬만한 위험으로는 입원이 어렵다. 자·타해 위험이 뚜렷하고 다른 모든 방법이 소진됐을 때야 겨우 내려지는 최후의 결정이다. 그러니 그 어린 나이에 그곳까지 갔다는 건 아이에게도 곁의 어른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다. “초등학생이 폐쇄병동이라니!”라는 말이 놀라움 같지만 사실은 절망의 다른 표현이다.


연지에게 그 만남으로 건네진 돈 몇 만 원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쟁취한 생계 수단이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유해한 환경과 폭력, 복잡한 가정사에 노출된 아이는 결핍을 상처로 받아들이기보다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처는 상처로 남아야 치유할 수 있다. 상처가 삶의 이유나 생존의 수단이 되어버리면 치유는 끝도 없이 꼬여버린다.


아이가 한말 중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느껴진 말이 있었다.
“이건 내 힘으로 번 돈이에요.”
그 말과 함께 잠깐 지었던 자랑스러운 표정.

그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라니.

어른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성실·근면·자립, 사실 아이도 다 하고 있었다.


다만 방식이 끔찍하게 꼬여있을 뿐이다.




루스의 눈빛

연지가 병동에 입원한 뒤,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밤마다 보던 미드 오자크(OZARK) 속에서 루스라는 캐릭터가 자꾸 눈에 밟혔다. 시즌4의 마지막회였던 것 같다. 그녀가 죽은 가족들과 대화하며 강을 바라보던 장면이 롱테이크로 잡혔다. 별것 아닌 장면인데, 그 순간 눈물이 펑펑 터졌다.


그녀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가족이 다 사라지고 지금 삶이 무너졌어도 그 상처는 현재의 나이고, 과거의 나였고 앞으로의 나일 것이라는 것. 그 눈빛은 처절하게 망가진 삶을 있는 그대로 붙들고 있었다. 나는 루스에게서 내가 만난 연지의 눈을 봤다. 상처를 안고도 버티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는 기묘한 강단. 그게 닮아 가슴이 시렸다.


결국 루스처럼,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치유의 유일한 시작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나는 조금씩 배운다. 가족이 남긴 결핍 앞에서 미움만으로는 끝낼 수 없다는 것을. 그 끝에는 용서와 사랑이라는 훨씬 더 고통스럽고 어려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부모가 안겨준 결핍은 분명 삶을 비틀었지만, 그걸 끌어안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미움은 숨만 쉬어도 자라나는데 용서는 늘 더디다.

진정한 사랑이 있긴한가?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 길을 향하는 자체가 다시 상처를 헤집는 일처럼 아프다.

그래서 용서와 사랑을 배운다는 건 거창한 미덕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 하루하루 겨우 붙드는 몸부림에 가깝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용서. 사랑. 말은 참 멋있다.

그런데 막상 해보려면 나에게도 세상 제일 어려운 숙제다.

뭐, 만약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세상 사람들 전부 이미 해치웠겠지.








어른인 우리에게 남는 질문

결핍을 남긴 부모를 향한 미움은 성인이 되어 갈 수록 숨만 쉬어도 자라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미움만으로는 끝낼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됩니다.

그 끝에 남는 건 더디고 고통스러운 용서와 사랑이라는 과제입니다.

답이 없는데 풀어야만 하죠.


미움의 벽을 넘어 사랑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신은 그 벽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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