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공간이 고통의 시작점이 될 때
사랑이 통제와 맞닿을 때 그 경계는 언제나 위태롭다.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은 영화 『피아니스트』는 그 경계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며 안정감을 찾으려 애쓴다. 상처가 남는 통증의 순간만이 그녀에겐 유일한 현실감이자 위로였다. 고통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이 여성은 사랑의 순간에도 비슷한 방식을 택한다. 연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안정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가 구축한 그 폐쇄된 질서와 통제의 세계는 끝내 무너진다. 연인은 그 구조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탈출을 감행한다. 통제가 깨진 순간, 주인공은 더 이상 고통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는 무감각의 상태로 떨어진다. 영화는 결국 그녀가 스스로를 해치려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의 세계는 그렇게 자신이 만든 질서에 의해 무너진다.
그 장면은 자기학대와 가학 사이를 넘나들던 그녀의 세계가 완전히 붕괴했음을 보여준다.
사랑과 폭력 사이의 그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합의된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합의가 있었다 한들, 그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다."
현장에서 마주하는 어른들 중엔 겉으로는 성인의 틀을 갖추었지만, 내면에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세상 한편에서 외롭게 견뎌오며, 마음 깊은 곳에 분노와 슬픔이 엉켜 있다. 그 감정은 때로 격렬한 비명으로, 때로는 얼어붙은 침묵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갓난아이의 울음을 누군가가 품에 안고 반복적으로 수용해주며 정서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이 원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내면의 아이는 자신만의 절규를 들어줄 안전기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반드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안정적인 시스템, 치료적 관계, 소중한 물건, 혹은 반복적 돌봄이 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어린아이에게 이 안전기지는 생존 그 자체다. 언어적 조절 능력이 부족한 아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기지 못할 때, 누군가의 온전한 수용을 통해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그런데 이 감정이 수용되지 않으면, 아이는 그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돌리게 된다. 자기파괴적 행동이거나, 공격성과 분노로 나타난다.
정서적 돌봄의 결핍은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다. 아무리 유능하고 부유해도 아이의 왜곡된 정서를 직면하지 않으면 아이는 결국 신호를 보낸다.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 아이는 무표정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혹은 날카로운 분노로 세상에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돌봄의 결핍은 되돌릴 수 있다.
관계 안에서 다시 경험되는 수용은 늦게라도 회복의 시작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부모나 교사만으로는 아이의 정서를 모두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고, 많은 보호자들은 자신의 삶조차 버겁다. 영화『피아니스트』 속 주인공의 엄마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듯, 현실 속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돌봄은 지역사회와 복지 시스템, 학교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어떤 아이들은 일그러진 사랑 속에서 자라난다. 감정이 왜곡된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킨다. 공포와 위협 속에서도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아이의 방식은 때로 외부에겐 낯설고 위태롭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믿는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한다."
하지만 이 명제가 무너지는 순간, 아이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가장 깊은 고통을 마주한다.
그 고통은 단지 한 번의 상처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체성과 자기감의 기반을 흔드는 깊은 균열이다.
가족이란 이름의 안전지대가 무너질 때, 아이의 세계 전체가 함께 무너진다.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다. 보호자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는 순간에 아이는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안전지대의 역설이다. 보호받아야 할 공간이 고통의 기원이 되는 순간 아이는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정서적 고통은 단순한 심리 문제가 아니다. 반복되는 해로운 돌봄과 방임 그리고 회피하는 제도 속에서 아이는 점점 자신을 잃는다. 그 상처는 결코 작지 않다.
아이들은 단순히 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이제 그 신호를 듣고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부모가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누군가의 아이를 품어야 할 책임이 있다.
아이의 울음을 단지 ‘시끄러움’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방임을 반복하는 것이다. 아이의 울음은 어른들이 감지해야 할 경보음이다
이 전제가 무너지는 순간을 들여다보면 우린 알게 된다.
내가 가장 무력함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가 바로 가정이 아이에게 상처의 시작점이 될 때이다.
어린아이에게 세상 전부인 부모가 상처의 원인이 될 때. 이 문제가 얼마큼 무거울지 상상이 되는가.
사랑이라 믿었던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상처의 시작이었다면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가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