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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Sep 15. 2018

헌신하는 사랑이 위태위태한 이유

감정의 주권은 언제나 나에게 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은 다양하다. 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사실, 즉 개인의 정체성은 타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타인의 영향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타인과 단절되는 상황은 불가능할 것이다. 누구나 나 아닌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기도, 더 많이 즐거워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특히 우리의 관심 주제인 행복감은 전염성이 있어서, 누구와 함께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는지는 행복감을 예측하는 지표가 된다.


즐거운 것이건 어떤 것이건 감정은 두 사람 사이에서, 그리고 더 큰 집단 사이에서 퍼져 나갈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에서도 유래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무엇을 느끼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과 연결 관계가 가깝거나 먼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 제임스 파울러, 《행복은 전염된다》 중에서  -




전염되기 위해 분리되어야 하는 아이러니


 하버드 대학의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 등이 진행한 연구를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끼리 모여 있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끼리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불행한 사람들은 연결고리들의 중심부에 위치하지 않고, 주변부나 끄트머리에 있었다. 크리스태키스와 파울러는 저서 《행복은 전염된다》에서 이를 설명하며, 행복한 사람들이 무리짓는 것은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인과론적 효과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지갑에 들어 있는 큰 돈보다 사회적 관계로 연결된 타인, 심지어 직접적인 관계가 아닌, 친구의 친구나 배우자의 친구 등 한 다리 건넌 관계 까지도 개인적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한다.


히키코모리가 아닌 이상, 일상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 는 대상 가운데 ‘사람’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사람에게 받는 이런저런 스트레스, 타인과 조화롭게 지내기 위한 고민은 모두가 안고 있다. 앞서 말했듯 사람들과의 관계가 개인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행복을 얻는 방법은 아주 단순할지 모른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사회적 관계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로부터 건강하게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정신적 자립이 되 어야 타인에 의한 기쁨에 전염될 수 있다. 연결고리가 그저 손을 잡고 있는 정도라면, 온기를 느낄 수 있고 마주 보고 미소를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얽히다 못해 엉켜 있는 경우라 면 다르다. 타인으로 인해 일희일비하거나, 내 감정이 나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타인에게 내맡겨진 상태는 위험하다.


그런 위험한 관계 중 하나가 부당한 의존성과 지나친 이타성의 만남이다. 이 만남은 대개 사랑이나 우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의존성이 높은 쪽은 상대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길 원한다. 전폭적인 애정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짠’ 하고 나타나 해결해주기를 바란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서적으로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의 갈증을 무한히 채워주기를 밑 빠진 독처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의 입장은 어떨까.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의존자의 요청을 계속 받아주는 파트너가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계속 받기를 원하는 만큼 반대쪽은 계속해서 사랑을 제공하려 애 쓰고, 무리한 요구도 들어주는 데 익숙해져버린다.


이런 관계는 아주 쉽게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기댈 곳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채워줄 사람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제공해줄 사람을 단번에 찾아낸다. 그리고 상대는 의존자의 결핍을 채워주고 응석을 받아줌으로써 본인도 스스로 일종의 위안을 느낀다. 겉보기에는 이타적인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나, 의존을 받아주는 이의 기저에는 이타적으로 행동해야만 내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타인에게 물리적, 심리적으로 무언가를 제공해 주어야만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다 자칫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까지 주려고 함으로써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문제지만, 정작 자신이 제공한 만큼 돌려받지 못할 경우 실망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 더 안타깝다. 상대의 부당한 의존을 계속해서 허용하는 것이 가 장 큰 함정이다. 이런 관계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한쪽은 주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받기만 하는 관계는 결코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헌신의 한계 


작가 김형경은 저서 《사람풍경》에서 이러한 관계를 두고, 동일한 의존성을 서로 반대 성향으로 표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양쪽 모두 심리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상태이다. 상대에게 지나칠 정도로 의존하는 것은 미숙한 사람의 병리적 의존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지탱하고 있는 쪽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 한다는 점에서 자립하지 못한 케이스이다. 그는 어쩌면 상대의 지나친 요구를 묵묵히 받아주면서, 그 행동을 통해 ‘나는 착하다’라는 썩 괜찮은 가치를 부여했을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 자신에게 써야 할 시간과 정성을 타인에게 먼저 썼을 것이고, 상대의 반응을 민감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런 식으로 상대에게 끌려 다닌다.


물론 이타성은 인류가 유지되는 데 기여한 중요한 특성이고, 이타주의는 많은 학자가 행복의 비결로 꼽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잊어버린 과도한 이타성은 그렇지 않다. ‘과도한’ 이타성은, 자신을 돌보아야 할 에너지를 타인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그러다 바닥이 보이고서야 깨닫는다. 그때 자신을 돌보려고 하면 상대방의 자기애적 분노를 피하기 어렵다. 결국 양쪽 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세우지 못해서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타인과 건강하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 마음의 한계,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다. 나를 보살피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내 마음과 삶을 스스로 돌보고, 타인의 것이 아닌 내 에너지로 나를 길러낼 수 있어야 한다. 남을 도우며 기쁨을 느끼고자 할 때에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나의 자원과 한계이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무작정 시간과 정성을 쏟다 보면 어느 순간 공허해진다. 적절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을 땐 분노감이 느껴지고 어느새 관계의 의미는 훼손 되어버린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스스로를 돌보고 기르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자신을 보살피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며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에게 자꾸만 기대려 하는 것이다.


‘과연 나는 행복한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무거운 질문이지만 관계 속에서 불쑥불쑥 자신에게 던져보면 좋겠다. 타인을 끊임없이 받치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이 더 위태위태한 것은 아닌지. 헌신만이 자신의 존재 가치라 믿는 것은 아닌지. 혹은 반대로 타인의 지지와 보상이 없으면 한 방에 무너져 버릴 상태는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다. 내 감정의 주권이 나에게 있을 때, 타인과 건강하게 이어질 수 있다. 그 때에야 사람들 사이로 흘러드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긍정적인 감정을 수혈받아,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인 것이다.



스스로 서있되 타인을 향한 창을 열어 둘 것


우리에게는 타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자주 함께하는 사람,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 그들의 감정은 나와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타인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나 또한 타인의 행복에 기여 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 옆에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연구 결과처럼, 타인과 함께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안전해 질지도 모른다. 단, 나 스스로가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내 마음이 스스로 서있지 못하면 행복도 괴로움도 내 것이 아닐 테니까. 타인에게 묶여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감정의 컨트롤러를 내가 잡되 타인을 향해 항상 창을 열어두기 바란다. 그들의 미소를 내가 비추어낼 수 있게 말이다.



* 위 글은 책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에 실린 "행복한 사람 옆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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