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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Sep 27. 2023

미움 받는 엄마가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

8화. 사랑을 채워야 사랑이 나오지

이전화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앞의 글을 보지 않으셔도 읽는 데에 불편함은 없으시겠지만 '자기 비난'을 주제로 한 이전의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요기 -> 링크 클릭



서로를 지적하지 않아도


남편과 나에게는 비슷한 습관이 있다. 상대방의 생각을 짐작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지갑을 잃어버렸던 날이었다. 집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았고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아침에 분리수거를 하면서 딸려 들어갈 수 있었겠다 싶었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아파트 공동 분리수거함을 뒤집어 내 지갑을 찾았다. 나의 잘못으로 지저분한 분리수거함을 뒤지게 해서 미안했던 나는 남편 표정을 살피다가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여자랑 결혼했나 싶어?'라고 묻는다.  (나는 이따금씩 휴대폰이나 지갑처럼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리곤 한다 ㅠㅠ) 그러나 실제로 그는 그저 배가 고팠을 뿐 나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이 없었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축구를 좋아하는 남편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리버풀 FC)이 경기를 할 때면 평소답지 않게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한다. 답답해하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하고, 신나서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하는데 그러는 도중에 나와 눈이 마주치면, 민망한 듯 '나 한심해 보여?'라고 묻는다. 나는 웃음이 터진다. 정말이지 나는 그가 축구 보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차분한 성격인 그가 감정이 요동치는 걸 볼 수 있는 기회이니 신기하고 웃기다. (가끔 동영상을 찍어뒀다가 약 올릴 때 써먹기도 한다) 일과 육아, 또 살림까지.. 쉽지 않은 아빠로서의 삶에서 '축구'라는 즐겁게 숨 쉴 공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도 그는 축구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질까 봐 염려하는 것 같다.


이렇듯 우리는 가끔 서로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을 (잘못) 읽어낸다.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둘 다 스스로가 형편없는 사람일까 봐, 한심한 사람일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상대가 핀잔을 주거나 지적을 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나를 비난의 시선으로 보고, 그 마음을 타인의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상대는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상대의 눈 속에서 나를 비난하는 시선을 의식한다. 얼마나 소심한 인간들인가 싶지만, 우리 부부는 일상의 곳곳에서 그런 일들이 꽤 많다. ('끼리끼리'는 괜히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가엾게 여기며 '우리라도 서로를 비난하거나 지적하는 말은 하지 말자. 이미 스스로에게 알아서 혼나고 있으니까.'라고 결론지었다. 잘못을 알고 있다면 두 번 혼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대신 스스로를 비난할 것 같은 순간마다 상대에게 격려하는 말을 해주자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몹시 진지했는데 지금 이렇게 글로 쓰고 있으니 좀 웃기다) 누구보다 평가와 비난이 얼마나 아프고 무서운지를 잘 아니까.



나에 대한 시선이 곧 아이에 대한 시선


지속적인 비난은 사람을 소진시킨다. 혼나기만 하는 아이는 위축되기 십상이고, 상사에게 욕만 먹는 직장인은 쉽게 지쳐버릴 거다. 악플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듯 격려와 지지 없는 무자비한 채찍질은 의도가 무엇이었건 생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내가 관대한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건 단순히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아이가 잘 클 수 있도록 비옥한 환경이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나를 평가하고 책망하면서 내가 나를 시들게 하는 면이 있었다.


사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쉽게 비난하는 건 엄마들만의 얘기는 아니다.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일 것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기 비난, 나아가 자기혐오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지난 화에 언급했듯) 이는 곧 우울과 불안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모습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분위기의 영향으로 보인다. 경쟁사회에서 비교와 평가에 익숙해져 그 안에서 자신을 나무라고 혐오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실제로 옛날에는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이 없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 이후에 나타난 증상이라는 것이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을 결과물이나 성과로 판단해야 하고, 분석하고 비판해야 하기 때문인 듯하다. 부족한 점을 개선시키고, 주변의 잘하는 사람보다 '더'잘하도록 몰아붙이는 것이다. 허튼 생각하지 말고 그저 잘하기만 하라고.


하지만 이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땐 어떤가. 결코 부족한 점, 잘못한 점에만 포커스를 두지 않는다. 애정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이 실수투성이라고 하더라도 격려하고 지지하고 응원한다. 부족함마저 이쁘고 사랑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 사랑의 눈으로 보내는 지지와 응원이 그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건이 아닌 생명을 대할 때는 이렇게 '분석적인 눈'을 빼고 바라봐야 하는 게 옳고 당연한데 우리는 그 눈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로 돌아가보자. 어떤 기준도 잣대도 없이 맑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봤지 않았던가? 어떤 흠도 찾을 수 없고, 모든 게 이뻐 보였다. 너무 작고 여렸지만 완벽한 존재임이 분명했지 않았던가. 아이를 보며 건강하기를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것이다. 그런 자연스럽고 크나큰 애정은 아이가 건강하게 발달하게 하는 자원이 된다. 하지만 엄마들도 사람인지라 한결같이 그런 사랑을 주기란 어렵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엄마들에게도 그런 에너지가 필요하다. 큰 사랑을 한결같이 주려면 그 사랑이 내 마음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도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귀한 생명으로 태어났다. 실수투성이의 나라고 할지라도 나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아이를 사랑하듯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된다.


 미움만 받는 사람이 누군가를 큰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을 너그럽게 안아주지 못하면서 아이를 큰 품으로 안아주는 게 가능할까.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은 결국 커가면서 아이를 보는 시선이 될 것이다. 즉, 내가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아이와의 관계를 예측할 수 있게 한다. 갓난아기 시절에는 오히려 사랑을 주는 게 어렵지 않다. 일방적으로 돌봄을 주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내가 나를 엄격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면, 아이가 커 나가면서 그 기준은 아이를 보는 기준이 된다. 내 부족한 모습이 오버랩되는 아이를 보면 화가 나고, 결점은 커 보이고 그럴수록 아이와의 관계도 순탄치 못해 더더욱 어려운 과제가 되어버린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거나, 뭔가 부족해 보이는듯할 때 불안을 견디지 못해 아이를 몰아붙일 것이다. 



나를 지지하고 격려하기 위해선 내 안에 있는 엄격한 잣대부터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준은 아니었는지, 혹은 나에게 알게 모르게 완벽주의성향이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형편없는 점수를 주는 건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가 엄격한 잣대를 가지는 요인 중 하나는 '엄마'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이다. 모든 걸 다 내어주는 사람. 희생과 헌신이 당연한 사람. 그런 천상계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는 '엄마'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도 잘 맞는 옷일 수 없다. 초보엄마들이 자신의 부족을 탓하며 좌절하기 쉽다. 

엄마는 현실의 인물이다. 영화 속 영웅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많은 여자들이 엄마가 된 후 단단해지고 성숙해지고 없던 용기가 생겨난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 말이 '충분히 강하지 않으면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모두가 신사임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석봉의 어머니가 될 수도 없다. 어린아이에게야 물론 신처럼 대단한 존재처럼 느껴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시대가 변한 만큼 엄마의 역할도 많이 달라졌다. 평일에는 직장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워킹맘도 많고, 반대로 아빠들이 살림을 전적으로 맡아서 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그저 자신에게 맞게 또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해내면 되는 거다. 약해질 수밖에 없을 땐 약해지는 거다. 그리고 그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지, '엄마'라는 전형적인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출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사회에서 요구하는 엄마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에 자신이 걸려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상화된 엄마상을 마음에 확고한 기준으로 둔다면 그렇지 못한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를 미워할 뿐일 테니.



이해와 수용의 눈을 키운다면

그러니 습관적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혼내려 할 때마다 잠깐만 멈추어보자. 그리고 그 시선을 잠시 무대 아래에 앉혀두고 이해와 수용의 시선을 찾아내자. 자기 사랑의 '사랑'이라는 단어는 가끔 너무 웅장하게 느껴지지만,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선을 키우면 된다. 더 잘하기 위해서, 더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서 애쓰는 마음이 나를 검열하고 비판해 왔던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수용의 태도는 결국 그런 애쓰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좋지 않은가. 힘을 빼고 나를 그저 바라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니 말이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태도이기에 한동안은 나의 실수나 부족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근질근질할 것이다. 마치 아이가 너무 쉬운 수학문제를 잘 못 풀고 있으면 '이건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잖아!'하고 지적하고 싶듯이. 그렇지만 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다 배우는 과정일 뿐이므로 알려주고 기다려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계속해서 수용하는 법을 알려주고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졌을 경우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 '나는 태어나기를 부족한 존재로 태어났어.' '나는 뭐든지 잘 해내지 않으면 존중받을 수 없어.'와 같은 부정적인 신념이 마음 아래에 있을 수 있다. 마음의 가장 아래에 이러한 자아상이 자리하고 있으면 당연히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봐주기가 쉽지 않다. 사랑받기 위해, 존중받기 위해 어떻게든 애쓰고 혹독하게 다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그룹 BTS가 언젠가 자기 사랑을 주제로 했던 연설이 기억에 남는다. UN 연설에서 리더 김남준은 사람들이 보내주는 사랑 때문에 자신들의 성취가 있을 수 있었다고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제 실수했더라도 어제의 나도 나이고 오늘의 부족하고 실수하는 나도 나입니다. 내일의 좀 더 현명해지는 나도 나일 것입니다. 이런 실수와 잘못들 모두 나이며 내 삶의 별자리의 가장 밝은 별무리입니다.' 자기 수용은 이렇듯 자신의 모든 모습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못난 모습은 소외시키고, 잘나고 빛나는 모습만 좋아하는는 것을 사랑이라 말하지는 않을 테니.




진정한 강함은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여자는 약하고 엄마도 약하다. 인간은 모두 연약하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서투르게 강한 척하다가 오히려 쉽게 무너지는 것 같다. 진정한 강함은 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전지전능해 보이던 부모가 결점을 지니고 여린 마음을 지닌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나도 성숙해져 갔던 것 같다. 부모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게 살아보려 애쓸 때, 때로는 자식인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 때 아이들은 단지 부모의 자식으로서가 아닌, 삶의 동료로서 같이 고민하고 또 성장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저 권위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엄격한 부모보다, 인간적인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자라난 어른은 다른 이의 결점이나 실수를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지게 될 게 분명하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을 테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이에게도 그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고.


물론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여전히 때때로 남편의 표정을 비난으로 읽어내며 굳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한다. 형편없는 사람일까 봐, 한심한 사람일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처럼 나와 잘 지내는 것, 나를 보듬어주는 것. 하루아침에 해줄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평생의 과제가 될 정도이니까. 그럼에도 그걸 해낼 수 있다면 아이와의 관계도,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그리 어렵고 힘든 일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을 주려면 사랑을 먼저 채워야 한다. 내 아이를 키울 연료는 내가 나에게 주는 격려와 지지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인생을 통해서 '나'를 키워갈 뿐이니 엄격한 시선을 거두고 따뜻한 힘으로 나를 키워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엄마와 함께라면 아이도 스스로를 잘 길러내는 멋진 어른으로 자라나지 않을까.






덧붙여.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은 긴 추석연휴가 시작된다고 들었어요. 누군가에게 명절은 오히려 더 무거운 날이 되기도 하지요. 부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평안히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작년여름 아이가 말도 잘 못하던 때에 "나무 안아 안아" 하면서 풀을 안아주려는 모습입니다. (초록색은 모두 나무라고 했던 때). 그 마음이 이뻐서 그림자마저 맑아 보이더라고요. 종종 꺼내보게 되는 사진이에요. 어른들은 잡초라고 여겼을 이 초록식물을 안아주는 아이의 마음처럼 저도 때로 제가 못나 보일 때라도 잘 품어보려고 합니다. 모두들 스스로를 잘 안아주는 날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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