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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Jan 15. 2017

사람의 삶에 보태는 슬픔

 이상하게 눈물이 늘었다. 오늘은 여수 수산시장 화재사건이 뉴스를 장식했다. 대목이 코앞인데, 불타버린 자신의 일터를 멍하니 바라보는 할아버지 사진에 눈물이 났다. 사상최악의  조류독감으로 농가들도 침울해졌다. 죄가 없는데 죽으라고 하니 닭들은 억울해서 울고, 농민들은 앞날이 막막해서 울었다. 그뿐인가, 실종된 포항 어선을 수색중이지만 아직 4명의 선원을 찾지 못했단다. 아는지 모르는지 날씨는 속절없이 자꾸만 추워진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니, 내가 눈물이 늘은 것인가, 아니면 유난히 슬픈일이 늘은 것인가. 혼란스럽다.


비선실세(의 딸)에 수십억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한국 최고기업의 부회장은 대통령의 압력에 못이겼을뿐이란다. 그럴듯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재벌도 무서운 게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것인가. 대기업도 꼼짝못하게 한 감방의 그녀에게 감탄해야 할 것인가.

최근 몇개월 동안 한국에는, 힘있는 자들의 재능잔치마냥 은폐되었던 일들이 폭죽처럼 하나씩 터져나왔다. 힘이 있으면 저런 일들도 꾸밀 수 있구나. 놀라워하기가 무섭게 죄다 자기잘못은 아니란다. 죄는 늘어가는데 죄를 지은 사람은 없으니 이것도 참 마술같은 일이다. 수십억짜리 말을 타면서 '능력없으면 부모를 원망하라'던 그녀는, '모든 건 엄마탓이야. 아몰랑'하며 남의 나라에서 엄마의 능력을 또한번 과시했다.


이런 기사들을 무방비상태로 맞고 있자니 분노하기에도 벅차다. 다만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그들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까?


추위속에서 자신의 일터가 불에 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상인의 삶을,

자신의 몸뚱아리가 유일한 생계였던 매몰된 인부들의 삶을,

천일이 지나도록 선체도 진실도 인양되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의 부모들의 삶을,

죄가 없이도 생명을 잃고, 생계를 잃어도 남탓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의 삶을 말이다.


단지 잘먹고 잘사는게 전부인데, 그런 '먹고사는 일'이 슬픔이 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에게만 유난히 보호장치가 두꺼운 것 같다. 서민들의 삶은 끊임없이 위협받는 것만 같은데, 그들은 늘 안전해 보인다. 두려움도 슬픔도 없는 그들은, 상아색 수의를 입어도 전국민의 비난을 받아도 마음이 참으로 안전한가보다. 치명적인 것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들의 삶이란 그런 것인가보다.


은폐가 특기요 거짓말이 취미인 지능형 로봇에게 분노하느니, 먹고사는 일에 더욱 충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에 슬퍼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슬프다. 

슬픔은 사람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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