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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생각들

미국 뉴욕의 HOPE 조형물

by 숲속의조르바




몇 년 전 중학생 조카와 친구 아들을 함께 데리고 유럽을 여행한 일이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프랑스의 파리로 이동하던 참에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을 교육적 차원이라며 데려갔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는 일본 몰래 세 명의 밀사를 보냈다. 일제의 부당한 국권 침탈을 만국평화회의를 통해 세계에 알려 도움을 청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일제에 의해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고, 이준선생은 행사장 인근의 호텔방에서 분사, 즉 분해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고종황제의 의도가 참 순진한 생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강대국들은 식민지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들 수많은 식민지를 가졌고 더 가지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즉, 일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죄 없는, 식민지 없는 강대국이 없었다. 그리고 끼리끼리 연합해서 더 많은 땅을 따먹어 넓혀도 모자랄 판에 굳이 존재감도 없고 뜯어먹을 것도 없는 조선을 위해 나서 줄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한다.

고종황제는 정의와 공정, 평화, 양심, 공생을 순진하게 기대했을지 모른다. 선비의 나라라서 그랬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컸을지도 모른다. 고종은 거사가 수포로 돌아가고 꽤나 낙담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니 학창 시절을 지나 사회로 나가면서부터 스스로 순진한 생각에 빠져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경력도 능력도 없는 미천한 나를 뽑아주고 가르쳐주고 돈까지 주고, 거기다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들으면 그 소속감과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기를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라는 말까지 소환할 정도였다. 돌아보면 내가 투여한 시간과 노력의 가치와 곁들인 감정에 대한 보상의 부등호는 늘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불쑥불쑥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도 언젠가는 보상받으리라 생각했다.


역시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굳건하게 지속될 거라 믿었던 관계들은 실로 꽤나 얄팍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 스스로의 순진한 기대가 만든 실망들이다. 일종의 희망고문이나 가스라이팅이 섞여 있었을지라도 이제껏 누군가로 받은 실망과 상처는 스스로 순진한 생각으로 키운 기대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보이스피싱이나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나보다.


“그걸 속냐? 속은 니가 잘못이지.”



최첨단 인공지능과 로봇이 화두인 2025년, 관세 부과로 시끄러운 날들에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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