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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씀 Nov 20. 2024

아플 때는 위로가, 건강할 때는 응원이 되어주는 음식

저에게는 일본 가정식이 그래요

제 배 속에 있는 염증이 단순한 염증인지,
크론병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의 일이에요. 


맹장 수술을 받은 뒤에도 뱃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염증 때문에 장결핵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장결핵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장결핵에 준해 우선적으로 치료를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계속되는 통증에 더 자세한 검사를 위해 신촌 세브란스로 병원을 옮겼어요. 그리고 첫 진료를 받자마자 대장 내시경 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장 내시경을 해 본 분들은 아실 거예요. 검사 준비도 아주 힘들고, 검사도 아주 힘들어요. 무엇보다 저는 이미 오랜 시간 아파왔고 입퇴원을 반복한 상태로 병원을 옮겼잖아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막다른 길에 몰려있는 상태였어요. 게다가 담당 교수님의 말씀에 따라 수면마취도 하지 않은 채 대장 내시경을 해야 했고요.


힘겹게 검사를 마치고 나와 무작정 신촌거리를 걸었는데요. 검사 결과도 걱정스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말이지 마음이 너무 심란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분명 병원에서는 내시경 후에는 속 편한 죽 같은 음식을 먹으라고 했는데요. 이미 병원 생활에 지친 제게 대장 내시경은 또 다른 병원 생활의 시작처럼 느껴졌어요. 앞으로 더 힘들 테지만 하나의 큰 산을 넘은 것 같았죠. 저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요. 그래서 생각했죠. 



신촌 근처에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이 뭐가 있더라?





일본 가정식, 하카타나카

홍대 인근에 하카타나카라는 일본 가정식집이 있어요. 사회 초년생 시절, 멘토링 활동을 하다 알게 된 후부터 종종 다니던 식당이에요. 당시 제 역할은 초등학생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는데요.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무척 좋아했던 아이 덕분에 만화 축제도 가고 홍대 인근의 만화 카페나 피규어샵 같은 곳을 함께 다니곤 했어요. 그리고 홍대에서 밥 먹을 곳을 찾던 중, 아이가 좋아하는 일본풍의 식당을 발견하게 된 거죠.



우연히 찾은 식당이었지만 주문해서 나온 음식은 정갈하고 깔끔했고요. 맛도 좋은 데다가, 기본 밑반찬이나 밥과 국의 리필도 가능했어요. 제 입맛에도 정말 맛있었는데, 같이 간 아이도 연신 맛있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배부르고 편안한 상태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만화 이야기, 게임 이야기를 비롯해 서로 꿈꾸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창 꿈 많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제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아이가 게임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저는 결혼해서 잘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몇 년 뒤 크론병이 찾아올 줄은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요.



하카타나카에서의 첫 경험이 좋았던 덕분에 일상에서 가끔 지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면 다시금 찾아갔어요. 일본 특유의 감성 가득한 분위기와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창가자리도 좋았고요. 음식 간도 슴슴한 편이라 속이 자주 불편한 제게 속 편한 음식인 점도 좋았어요. 제게 하카나타카는 위로받고 싶을 때 가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곳 같아요.





그날도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내가 희귀 난치병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두려웠고요. 원래도 튼튼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도 걱정이었어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마음과 배고픔에 병원에서의 주의사항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실 맹장수술 때부터 한동안 직장을 쉬어서 통장 잔고도 넉넉하지 않아 식당에 가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죠.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하카타나카엘 갔어요.



역시 그곳에서는 예전에 제게 꿈을 이야기하던 아이와의 추억도 남아있었고요. 혼자 평화롭게 밥을 먹거나, 가끔 친구나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눴던 제 모습도 생각이 났어요. 그리고 대장 내시경을 마치고 채 2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일반식을 먹으러 온 순간도 더해졌고요. 물론 바삭한 치킨과 고소한 타르타르소스의 조합, 부드러운 식감의 기본찬, 퐁신퐁신한 계란말이에 찰기 있는 밥까지 여전히 맛도 완벽했어요. 



워낙 부드러운 메뉴라서 먹으면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심도 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래도 튀김과 질긴 야채가 포함된 일반식이지만요. 오랜만에 먹은 일본 가정식은 아주 맛있었고 기분도 꽤 나아졌지만, 그날 밤에는 배가 너무 아파서 다시 응급실에 가야 했네요.








그리고 한 달 뒤, 저는 장에 천공(구멍)이 생겨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어요. 장장 40일이 넘도록 입원하며 고열과 검사를 반복하다 결국 크론병 확진을 받았습니다. 진단을 받고 치료법이 어느 정도 정해지자 퇴원이 결정됐어요. 몸무게는 53kg까지 빠졌고 세 발자국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는 상태였지만, 아무거나 먹을 수 없는 크론병 환자. 무엇보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돌보아야 하는 방법까지도 잃어버린, 저는 크론병 환자가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오직 살기 위해 먹을 뿐, 관심을 가질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많이 건강해졌고 앞으로도 튼튼해질 일만 남았는데요. 가끔 홍대를 갈 때도 있지만 아직까지 하카타나카에서 일본 가정식을 먹을 일은 없었어요. 요즘 삶이 그다지 힘들지 않아서였을까요? 그래도 조만간 아내와 한번 가보고 싶어요. 



저의 일본 가정식 추억에 아내와의 순간도 더하면 정말 좋을 것 같거든요.




※ 아내가 이 글을 읽더니 아무리 그래도 왜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안 했냐고 묻네요. 글쎄요, 분명한 건 아내와 만난 이후로 병원에서 하는 말을 안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게는 보호자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요 :)


▶ '먹을 수 있다는 행복한 기적' 브런치북에는 크론병 환자로서 가진 음식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되는 이야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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