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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 Oct 23. 2021

장수의 비결, 자본주의?




 중국과 인도의 기대수명은 19세기 동안 정체하거나 혹은 감소하지만, 어쨌건 1920년 경 이후로는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많은 개발도상국들 역시 수명의 증가세에 동참한다.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인류의 도약이 시작되었다는 스티븐 핑커가, 그 ‘진보’의 또다른 증거로 제시하는 사실은 이 기대수명의 급증이다. 스티븐 핑커는 과거에 비해 인류가 얼마나 많은 질병을 극복했고(«계몽», 6장), 또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긴 수명(5장)을 누리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에서도, 한 축에는 소득 수준을, 한 축에는 기대수명을 놓고 국가들을 그 소득과 수명 수준에 따라 늘어놓은 그래프가 등장한다(p.134). 그는 테드 강연을 통해서도, 세계의 국가들이 어떻게 과거에 비해 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며 동시에 더 장수하게 되었는지를, 데이터 시각화를 통해 인상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기대수명은 인구 집단의 건강 상태를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정보다. ‘건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쉬이 답하기 어렵지만, 불건강이 극단에 이를 때에 생명체는 사망하게 된다는 사실에는 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사망률과 직결된 출생시의 기대수명은, 역으로 해당 인구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사망률’과 ‘기대수명’은 모두 인구의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개념들이다.


 동시에, 기대수명의 추세는 세상의 변화가 어떤 방향을 향하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정보다. 로슬링의 말대로, 인재나 자연재해, 사고, 빈곤, 기아 따위 인간을 괴롭혀온 온갖 불행으로부터 비롯된 사망도, 그와 더불어 의료 기술의 발달로 목숨을 구한 생명도, 모두 사망률에 반영되기 때문이다(p.81). 스티븐 핑커가 ‘진보’의 증거라 주장하는 '식량(7장)', '안전(12장)', '평화(13장)' 따위의 개선 역시 마찬가지로 기대수명의 향상에 조금씩 기여한다. 식량의 개선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줄어들고, 안전 환경의 개선으로 사고 사망자가 줄어들고, 평화로 전쟁 사망자와 범죄 사망자가 줄어들면, 사망률이 감소하고 그에 상응하는만큼 기대수명도 조금씩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낙관주의자'들이 진보의 증거로 인용하는 상당수의 지표들이 결국 '기대수명' 지표로 수렴하는 셈이다. 그래서, 현대 인류가 과거의 선조들에 비해 얼마나 더 나은 삶을 사는지 비교하기 위한 지표로서 기대수명의 추세는 매우 집약적이면서도 경제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재해와 사고, 빈곤, 기아, 질병, 폭력 따위 인류 역사를 따라다니는 질곡으로부터 해방될수록, 인류는 더 건강해저 더 긴 수명을 누리게 된다.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보면, 분명 오늘날 인류는 과거에 비해 훨씬 건강해졌고, 건강해지고 있으며, 이는 그야말로 인류를 따라다니는 불행은 점점 줄어들고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다는 가장 직접적이면서 결정적인 증거다. 인류의 평균 수명을 묻는 한스 로슬링의 질문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택한 답은 “60세”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답은 70세, 더욱 정확히는 72.6세 정도다. 우리는 인류의 건강이 개선되는 속도에 대해서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인류가 이렇게 긴 수명을 누리게 된 건 인류가 존속해온 오랜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극히 최근의 일에 불과하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 평균 수명은 30세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평균 수명이 30세라고 하니, 인류의 선조들이 대부분 30살 즈음에 늙어 죽은 것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전근대 시기의 낮은 기대수명은 (물론 모든 연령대에서 사망률이 오늘날보다 높았지만) 무엇보다도 높은 영유아사망률로 인해 특히 5세 이전 혹은 0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개체들이 전체 평균 수명을 깎아버린 탓이 제일 크다. 달리 말하면, 현대 문명의 개화 이전 인류에게는 성년까지 생존하는 것이 장수로 가는 길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셈이다.


그림1. 전세계 기대수명 추이


 인류가 이런 역사적 한계를 넘겨 40세 이상의 수명을 평균적으로 누리게 된 건 불과 일백년도 채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1900년 이래 급격히 증가한 인류의 수명은 1970년대에 비로소 60세를 넘기고, 2019년 현재 72.6세를 기록한다. 인류 문명이 현대로 진입하기 직전, 출생 시 평균 기대수명이 30세에 채 미치지 못했던 것에 비해, 오늘날 인류는 두 배 이상의 수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 그렇다면, 인류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장수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을까? 




 스티븐 핑커의 «지금 다시 계몽»에서는  (6) 할애해 의학적 측면에서 인류가 이룩한 진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황열병, 천연두, 폐렴, 장티푸스, 결핵  사람들을 어린 나이에 죽음으로  많은 질병들을, 현대 의약 기술은 극복했거나, 점점 소멸시키고 있다. 물론, 의약의 발전은 평가할 가치가 있는 긍정적인 변화임에 틀림없지만, 과연 인류가 비교적 최근의 근대사에서 경험한 기대수명의 분절적인 증가를 설명하는 주요한 변수일까? 이런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 학자가 바로 토마스 매큐언(Thomas McKweon)이다(McKweon & Record, 1962; Mckeown, 1988). 매큐언은 질병의 근본 원인을 사회경제적 요인에서 찾는 사회역학의 선구자인데, 그에 따르면 인류를 괴롭힌 주요한 전염성 질병의 사망률은, 이들 질병에 대한 유의미한 의학적 대응이 이뤄지기 이전부터 이미 감소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851년에서 1900 사이 영국(잉글랜드-웨일스) 사망률 감소에서 거의 절반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던 질병인 결핵에 대해 효과적인 의학적 처치가 이뤄지기 시작한  20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947년에야 비로소 스트렙토마이신이 사용되면서 결핵에 대한 의미있는 치료가 가능해졌는데, 영국에서는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이   19세기부터 이미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 있었던 . 특히 산업화가 수반한 도시화와 인구 과밀화로 인해, 공기를 매개로  전염성 질병에 취약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음에도 사망률이 감소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할 만하다. 당시 영국의 산업도시들은, 즐비한 공장들이 내뿜는 매연으로 인해 대기의 급격한 오염을 겪고 있었고, 인구가 밀집한 폐쇄된 환경에서의 공장 노동 역시, 공기를 통해 전염병의 확산이 이뤄지기 매우 쉬운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급격히 늘어난 인구가 매일 생산해내는 생활 폐기물과 분뇨 따위로 오염된 물도 전염병 확산에 치명적인 조건이었다.


 환경이 이렇게 오염된 조건에서, 깨끗한 물의 공급이나 하수 처리 등 위생의 개선이 이뤄졌다면, 사람들의 질병 역시 크게 감소했음직 하다. 스티븐 핑커 역시 "무엇보다 공공 하수도를 건설하고 염소 처리된 수돗물로 식수를 보호하고부터 수십억 명이 목숨을 구했다(«계몽», p.108)"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위생 개혁은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수인성 질병의 감소는 설명하지만, 공기를 매개로 한 감염병인 결핵과는 큰 관련이 없다고 매큐언은 생각했다(McKweon & Record, 1962). 매큐언은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뤄진 결핵 사망률 감소를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으로 산업혁명이 가능케 한 급속한 생활 수준의 개선을 지목한다. 사망률 감소 원인의 유력한 후보군들 가운데 의학적 치료도, 질병 노출 환경의 감소도, 혹은 그보다도 가능성이 낮은 인체의 유전적 변화로 인한 저항력의 변화도 사망률의 감소를 실제로는 설명할 수 없다면, 남은 후보인 영양 수준의 개선이 가장 유력한 변수라는 소거법의 논리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어 더 많은 영양 섭취를 통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키웠기 때문에 사망률이 감소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결핵 감소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사망률 감소의 약 절반을 차지하므로, 매큐언에 따르면 생활수준의 개선이 대략 사망률 감소의 절반 이상을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변수다. 즉, 산업혁명이 야기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보다 부유해진 인류가 더 나은 영양 상태를 누리게 됨으로써 더 긴 수명 역시 누릴 수 있었다는 것.


 경제학자 로버트 포겔(Robert Fogel) 역시 이런 설명에 지지를 보탠다. 과거 사람들의 신장에 대한 자료를 활용해 생활수준을 측정하는 계량경제사 연구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신장과 체중 등 인체의 영양 상태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지표들이 사망률을 잘 예측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Fogel, 1997; Fogel, 2004). 그의 발견에 따르면, 신장과 체질량 지수 등 영양 상태의 지표들은 1775년경에서 1875년경 사이 영국과 프랑스의 사망률 감소는 약 90%를, 그 이후 100년 사이의 사망률 감소는 약 절반 정도를 설명한다고 한다.


환경 오염을 겪는 산업혁명기 영국의 산업도시


 현대 의학의 힘이 인류의 수명 증가에 기여한 바가 적다는 매큐언의 주장은 뜻밖이지만, 경제 성장과 영양 상태를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데에서는 역시 고개가 끄덕여진다. 스티븐 핑커의 말("지극히 분명한 사실은 1인당 GDP가 수명, 건강, 영양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계몽», p.157)처럼 산업자본주의가 선물한 경제 성장의 직접적 산물인 물질적 풍족이, 인류에게 더 길고 건강한 삶까지 선물해준 걸까. 스티븐 핑커 역시 «계몽»의 7장에서 식량 문제의 해결이 인류의 건강에 크게 기여한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매큐언과 포겔의 견해에 대해서도 이의가 제기되었다. 인구학과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사이먼 스레터(Simon Szreter)는 매큐언의 통계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Szreter, 1988). 매큐언은 결핵의 사망률이 1847-50년부터 이미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1850년대 초반 다시 증가했고, 이후 1866-7년에 이르기까지 사망률이 그 밑으로 감소하는 뚜렷한 추세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매큐언이 지목한 1847-50년의 사망률 감소는 단기적 변동일 뿐, 장기적 추세의 터닝 포인트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매큐언의 주장처럼 결핵의 감소가 전체 전염성 질병의 사망률 감소를 견인한 중추적 요인이었다고 믿을만한 증거는 사실 충분하지 않다. 또한, 매큐언에 따르면 영양 상태와 관련이 있을 공기 매개 질병인 기관지염, 폐렴,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률은, 감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한 현상을 고려하면, 장티푸스와 콜레라 등 공중 위생과 관련된 질병이 19세기 후반 사망률 감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매큐언의 입장을 따르면, 공기 매개 전염병인 결핵이 사망률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이며, 결핵 사망률 감소의 이유는 영양 섭취의 개선이다. 결핵은 환자의 다른 질병에 대한 저항력 역시 감소시키므로, 결핵의 감소가 다른 질병에 선행했다면, 결핵의 감소는 결핵뿐 아니라 다른 질병 역시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을 터였다. 따라서 매큐언의 논리를 따르면, 영양 섭취의 증가가 수명 증가의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 된다. 하지만, 스레터의 해석을 따르면 그 반대가 된다. 공중 위생 관련 질병의 감소에 의해 결핵을 포함한 공기 매개 질병으로 인한 사망도 덩달아 감소했다고 보는 것이 그 반대보다 더 그럴듯한 설명이 된 것. 즉, 스레터에 따르면, 19세기의 마지막 30년 사이에 진전된 위생개혁이 영국의 사망률 감소를 견인한 주요한 동인이었다. 이런 스레터의 설명은 사망률 감소에서의 공중위생학의 역할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질병에 대한 약학적 치료만으로 국한해 수명 증가와 관련한 의학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매큐언의 설명에 비해, 그 역할을 보다 공정히 평가해주는 것 같다.


 경제 성장으로 인한 영양 섭취의 증가가 수명 증가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매큐언의 주장에는 또 다른 반대의 증거들이 있다(Szreter, 1988). 예를 들어,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 비해 높은 소득 수준과 영양 접근성에도 불구하고 1890년대 직물 공장 노동자들의 호흡기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약 2.5배 높았던 현상은, 공기 매개 질병은 곧 영양 섭취와 관련있다는 매큐언의 도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18세기에 증가 추세에 있던 영국인의 수명은 1820년대에서 1870년에 걸쳐 증가를 멈춘 채 정체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와 일치하였다(그림2). 경제 성장이 곧 영양 상태의 개선을 통해 수명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단순한 경제 결정론으로는 설명하기 곤란한 현상이다.


그림2. 영국의 기대수명 추이


 물론 1820년 이전까지는 수명이 증가하는 추세를 볼 수 있지만, 이 시기 영국이 경험한 기대수명의 증가는 사실 전근대 유럽에서 반복되어온 사망률 증가와 감소의 연속적 변동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으로, 1870년 이후에 비해 비교적 미미한 변화일 뿐이었다(그림2). '이스털린의 역설'로 유명한 경제학자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이 지적한 것처럼, 산업혁명 전반기에 걸쳐 이뤄진 영국의 수명 증가는 기껏해야 17세기 이후 감소했던 기대수명을 1600년 즈음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으로 돌려놓은 정도에 불과했다(Easterlin, 1999). 이스털린은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된 시점에 비해 100년 가까이 늦은 1870년대에야 비로소 그 이전의 추세와 질적으로 다른 사망률의 감소세를 경험한다고 지적한다. 그 반환점인 1871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 반세기 동안 영국인들의 수명 증가는 그 이전 반세기의 4배 수준이었다. 선발산업국인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후발산업국인 스웨덴과 일본, 혹은 개발도상국인 브라질과 인도에서도 역시, 그 이전 반세기보다 그 이후 반세기의 수명 증가가 작게는 3배에서 크게는 6배 높은 수명 증가의 역사적 분기점은, 근대적 경제 성장의 기점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들 선발산업국과 후발산업국 및 개발도상국들에 걸친 근대적 경제 성장의 확산은 약 170년 동안 이뤄진 데에 비해, 수명 증가의 역사적 분기점은 단 7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발생했던 것. 개발도상국인 인도에서는 아예 기대수명의 분기점이 경제 성장의 분기점보다 먼저 발생하기도 한다. 인도 외에도, 쿠바, 필리핀, 스리랑카, 비교적 최근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근대적 경제 성장 이전에 이미 비슷한 기대수명의 항상을 경험한 저개발 국가의 사례들은 많다(Easterlin, 1995). 즉, 인류의 수명을 급속히 증가시킨 분기점을 산업혁명이 야기한 경제 성장에서 찾기는 어렵다.


 스레터는 오히려 산업혁명기의 경제 성장이 기대수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Szreter, 1997). 산업화와 도시 인구의 과밀로 인한 질병 환경의 조성 때문에 산업혁명기 가장 급속한 경제성장을 겪던 산업 도시 지역은 오히려 기대수명이 전국 평균에 비해 낮았으며, 19세기의 두번째 사반세기 동안에는 이들 지역 상당수가 기대수명의 감소를 경험했던 것. 산업화를 수반한 급격한 경제 성장은 정치적으로도 수명 증가를 위한 개혁이 이뤄지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했다. 산업화로 인해 종래의 사회 구조가 해체되는 동시에, 새로이 출현한 사회 계급들 사이에 새로운 이해관계가 형성되며 정치적 분열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신진 자본가와 그들에 의해 고용된 임금노동자, 장인 계층부터 봉건적 사회구조의 잔재인 지주 귀족들까지,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며 산업화로 인해 당면한 인구학적 문제에 대한 정치적 대응은 점점 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도시 환경을 개선하려는 정치적 시도들은 공장이나 작업장 등을 소유한 자산가, 지주 등의 이익과 때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Szreter, 1988), 특히, 스레터는 산업 혁명으로 인해 성장한 도시 쁘띠 부르주아 자산계급의 반대가 위생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Szreter, 1997). 수도 인프라의 건설과 하수 처리 시스템의 완비 등 위생 개혁의 구체적인 과제를 위해서는 정부의 경제적 역할의 증대가 필요했고, 또한 그 재원의 조달은 결국 자산계급의 주머니를 통해야 했다. 하지만 이는 방임주의와 ‘작은 정부’를 지지하는 자본가들의 이익과는 충돌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당시 산업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던 자유지상주의적 원리를 얼마간 유보해야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위생 개혁은 결코 정치적으로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이런 난제의 해결에 물꼬를 튼 것은 노동자 계급의 요구에 부응해 이뤄진 선거법 개정이었다. 새로이 유권자가 된 노동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정치적 경쟁을 통해 지방 단위의 위생 개혁이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산된 것. 물론 그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지방자치시 단위 위생개혁의 선두에 있었던 버밍햄 지역의 ‘도시 사회주의’는 공공연히 “공산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실제로 버밍햄의 시장을 지낸 체임벌린의 ‘도시 사회주의’ 모델은 이후 영국 사회주의 전통의 주축인 페이비언 운동의 주요한 아젠다로 자리잡는다; 김명환, 2012).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영국에서 경쟁적으로 전개된 상수도의 시영화(municipalisation)는 수인성 질병의 감소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기여한다(Beach, Troesken & Tynan, 2016). 즉, 영국의 수명 증가는 경제 성장의 부산물로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려운 조건 위에서 이뤄진 정치의 결과였다. 하지만, 스티븐 핑커는 공공 하수도의 건설 등 위생의 개선이 건강에 크게 기여한 점은 기록하면서도(p.108, p.115), 그 프로젝트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소 무관심하다.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이 위생개혁은 영국만의 특징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이뤄진 위생개혁의 주요한 프로그램이었던 수도의 시영화는 이후 유럽 전역과 미국의 도시로 확산된 하나의 표준적 시책이었으며, 때로 압류와 강제 인수의 수단을 통해서 이뤄지기도 했다(Beach et al, 2016; p.3).


노동자 계급의 선거권을 요구한 차티스트 운동


 위생 개혁의 역할을 염두에 둔 채, 신장과 체중 등 신체의 영양 지표와 사망률 사이의 관계에 대한 포겔의 연구를 상기해보면, 그 의미를 다시 해석해볼 수 있다. 인류는 위생개혁으로 말미암아 개선된 환경을 누리게 되며 비로소, 인체가 섭취한 영양의 손실을 막고 더 나은 영양 상태를 확보해, 더 긴 수명까지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영양 지표가 사망률 및 수명과 직접 연결된다는 포겔의 발견은 분명 의미가 있지만, 영양 지표의 개선은 사실 경제 성장을 통한 영양 섭취의 증가만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영양의 손실을 야기하는 질병 환경의 제거를 통해서 이뤄질수도 있었던 것이다(Deaton, 2006; Easterlin, 1999; 2000). 다수의 문헌들을 검토한 끝에, 이 연구 주제와 관련해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인 “사망률의 결정요인(The Determinants of Mortality)”이라는 이름의 2006년 논문에서, 경제학자 데이비드 커틀러(David Cutler)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등은 후자의 요인, 즉 “공중 위생의 개선”이, “1870년 이후 사망률의 감소에 대해 더 일관된 설명을 제공”한다고 평가한다(Cutler, Deaton & Lleras-Muney, 2006, p.101). 실제로, 최근의 한 계량 연구에 따르면, 도구변수(독립변수와는 직접 상관을 맺는 반면 종속변수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관계는 낮아, 독립변수의 외생적인 변화가 종속변수의 변화로 이어지는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데 사용되는 변수)로 추정한 공중 위생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1860-1900년 사이 영국 도시의 사망률 감소를 45-60% 정도 설명한다(Chapman, 2019). 그에 비해, 세원(tax base)으로 대리한 지역별 부(wealth)의 수준은 사망률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관계가 없거나, 혹은 도구변수를 사용한 모델에서는 오히려 사망률과 정(+)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혁명기의 경제 성장이 아니라 위생 개혁이 사망률 감소의 근본적인 동인이라는 스레터의 주장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통계적 증거인 셈.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최근의 계량연구들은, 위생의 개혁이 영국뿐만 아니라 19세기에 일찍이 기대수명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던 유럽 주요 국가들의 사망률 감소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Kesztenbaum & Rosenthal, 2017; Gallardo-Albarran, 2020).


 결국, 인류가 최근 100여 년 사이 이룩한 불건강한 삶으로부터의 '대탈출'은, 경제의 발전만으로는 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 성장이 수명의 증가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물론 초기 산업자본주의 아래 전개된 근대적 경제 성장이 위생 환경의 악화를 통해 인간의 복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측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부정적 요소가 크게 개선된 위생 개혁 이후에는 경제 성장이 인류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촉진제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과연, 얼마만큼의 수명 증가가 경제 성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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