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무서웠던 책이 파리대왕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책의 줄거리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막연한 공포와 토할 것 같았던 역한 느낌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한번 읽는다는 것에 대해 많이 주저되었다.
올해 목표 중에 하나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1권부터 순서대로 읽어 나가면서 50권까지 서평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 책만 건너뛰기가 그래서 몇십 년 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읽어 나가다가 보니까 10대 때 내가 느꼈던 것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만큼 책 내용이 무섭지는 않았고, 책 속에 담겨 있는 철학적 비유와 은유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책 자체는 여전히 모호하고 기분 나쁜 느낌의 책이다. 핵전쟁이 일어난 후 비행기에 타고 있던 어린 소년들이 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조난당한다. 어른도 없이 6살에서 12살 정도의 남자아이들만 살아남는다. 아이들의 숫자는 책에서 끝까지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대략 수십 명 정도쯤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12살짜리 금발의 랠프라는 아이를 지도자로 뽑고, 규칙을 만들고, 불을 피워 봉화를 만들어 구조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불을 피워 문명사회에 돌아가고자 하는 랠프의 방법이 아니라, 당장 사냥을 하여 먹을 것을 구하자는 야만적인 잭의 그룹이 힘을 가지게 된다. 문명과 야만을 대표하는 랠프와 잭은 대립한다.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아이들을 덮친다. 아이들이 무서워한 것은 실제로는 낙하산에 매달려 추락한 조종사의 시체였는데, 어두운 밤에 정확하게 보지 않고 낙하산이 바람에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이라고 무서워한 것이다. 잭을 포함한 사냥꾼 아이들은 이 짐승에게 사냥한 암퇘지의 머리를 조공으로 바친다. 암퇘지의 머리는 썩어가면서 파리가 꾀어 파리대왕이 된다.
이 책의 파리대왕은 실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공포와 악마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태평양의 무인도라는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이국적 풍경 속에서,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야만적으로 변해 간다. 당장 먹고살기 위한 동물 사냥뿐만 아니라, 질투와 분쟁으로 패가 나누어지고 인간 사냥까지 하게 되는 지옥도가 펼쳐지게 된다.
잭을 포함한 사냥꾼 아이들은 얼굴에 칠을 하고 원시인처럼 난폭해지면서, 친구였던 다른 아이 둘을 죽인다. 결국 지도자인 랠프까지 죽이려고 온 섬에 불을 놓고 창을 들고 추격하다가, 그 연기를 보고 온 영국군 장교와 배를 만나게 된다. 랠프와 아이들은 구조의 안도감과 친구의 죽음이 슬퍼서 울음을 터트린다.
이 책은 모호한 은유들로 가득 차 있어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실제 인류의 삶은 이 책에 나오는 내용보다 더 악마적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은 부인하고 있지만, 전쟁이나 전염병이 휩쓸고 가는 시기에는 수많은 마녀사냥들이 있었다. 우리는 문명인이라고 자부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공포에 휩쓸려 이성적 판단을 잃어 가고 있을 수도 있다.
밑줄 친 문장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