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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원 Jun 14. 2020

정리의밤

군산에 갔다가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스페이스코웍에서 하는 스타트프롬군산이라는 콘텐츠 교육 프로그램 성과공유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는데, 20팀이 넘는 팀들이 본인들이 하는 일을 열심히 발표를 했다. 발표팀 중에 삐약삐약출판사라고 독립만화출판사가 있었는데, 직접 만든 책이라고 만화책을 한 권씩 주었다.


나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보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 보게 되었다. 만화책이라서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 보다 그림과 글 내용에 깊이가 있어서 다시 한번 세밀히 보게 되었다.


글의 스토리 구성이 탄탄했다. 회사에서 좌천되어 부산으로 가게 된 30대 초반의 해은은 서울에 살던 집의 물건들을 다 정리하려고 한다. 친구들에게 소파와 그림, 기타 드럼과 같은 물건들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댓글 남기라고 하고, 부산 가는 길에 직접 배달해 주기로 한다. 큰 렌터카를 하나 빌려 서울에서 단양, 군산, 순천을 거쳐 부산으로 내려간다.



단양에 사는 친구 수는 학창시절에는 조용한 아이라는 희미한 기억 외에는 없었는데, 다시 만나 보니 패러글레이딩도 하고 생각 보다 선명하게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이사를 많이 다녔던 해은은 수에게 본인의 집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해준 작은 소파를 준다.


군산에 사는 학창 시절 아주 친했던 지후는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건물주가 꿈이었던 친구는 술을 같이 마시면서 속물적으로 변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은은 친구에게 주려고 가지고 왔던 소중히 여겼던 그림을 다시 가지고 길을 나선다.


순천에는 대학시절 같이 밴드를 했던 선배가 있다. 선배가 어린 아들에게 준다고 기타와 드럼을 요청했었는데, 막상 순천에 와 보니 선배는 없고 어린 아들만 아빠가 있는 서울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무지개를 보면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추운 겨울에 마술처럼 무지개가 나타난다.


사실 이 무지개는 일종의 은유처럼 보인다. 해은은 키가 커서 '큰 해은'이라고 불리는데, 이름이 같아 '작은 해은'이라고 불리는 남자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해은이 어려울 때 진심으로 보살펴 주고 자기 집에서 살게도 해 준다. 큰 해은은 작은 해은과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었지만,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하는 작은 해은은 외국으로 떠나서 외국 남자와 결혼한다. 세상의 편견 때문에 학창 시절부터 괴로워했던 작은 해은의 고통을 알고 있는 큰 해은은 차별 없이 자유로운 세상을 꿈꾼다.


큰 해은의 전국 일주와 같은 여행은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비워야 새로 채울 수 있는 것처럼 과거의 방을 정리해야만 새로운 미래의 방이 만들어질 수 있다.


https://sidebkr.imweb.me/shop_view/?idx=67


* 내가 얼마 전에 우연히 본 '500만 원으로 결혼하기'라는 만화책의 저자인 불친이 이 '정리의밤'이라는 만화책의 저자인 불키드의 부인이며, 어제 군산에서 발표를 했던 삐약삐약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발견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607894


* 어제 삐약삐약출판사가 발표하기 전에 복합공유공간을 운영하는 발표자가 복합공유공간 운영의 어려움과 교육 콘텐츠를 무엇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삐약삐약출판사 발표자는 독립만화출판의 운영 어려움을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만화나 웹툰 강좌를 복합공유공간에서 열고, 교육생 중에 우수한 작품은 책으로 만들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고 순수 창작 만화만 고집하지 말고, 기존의 텍스트로 된 책들 중에 만화로 만들면 좋은 책들을 골라서 만화책으로 만드는 작업도 같이 해 보라고 권했다. 얼마 전에 내가 읽었던 민음사의 중국신화전설은 글로만 읽어서는 사실 신이나 괴물들의 이미지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어린이용 만화로 나온 중국신화를 같이 보니까 이해가 훨씬 빨리 되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모든 책을 만화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어떤 책들은 만화로 만들 경우 더 좋은 책들이 있다.


글 : 이계원(공유경제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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