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혐오를 극복하게 만든 말 한마디
너는 왜 항상 이렇게 한심하게 사는 거야?
살아 평생 남에게 날선 말 한마디 못해봤던 내가 수도 없이 내 자신에게 퍼붇던 말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기에 나 잘되라고 버릇처럼 해왔던 나를 향한 질타와 비난들은 시작은 좋은 목적에서 행했으나 그 끝은 나를 향한 혐오의 감정에까지 이르렀다.
보통 자기혐오의 시작은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고 공교롭게도 그 비교 대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엄친아'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키도 큰 그야말로 엄마 주변 친구의 완벽한 아들. 내가 학생일 당시에는 우리 엄마 주변에 그런 아들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구태여 비교하지 않았던 걸까?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엄친아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명 그런 존재가 있었다.
바로 상상으로 만든 가상의 나라는 엄친아.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친구는 다른 어떤 엄친아보다 완벽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완벽해졌다. 그 뒤를 따라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있는 내게 그는 택도 없다는 듯 비웃었고 그와 나와 차이가 벌어지면 벌어질 수록 나는 노력에 대한 성취감보단 자신에 대한 부족함만을 절실히 느낄 뿐이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상처 입히는 우스운 비교 습관은 고등학교를 넘어 대학교 때까지 이어졌고 우습게도 월급 150만 원을 받던 그 최악의 시기에 그만뒀다.
길원씨는 글을 되게 잘 쓰는구나?
첫 회사에 들어온 지 몇 주 안 된 시점, 블로그 글을 쓰는 업무를 하던 내게 팀장이 건넨 말이자 평가를 받는 자리에서 내가 처음으로 받는 칭찬이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건 좋아했고 학교 학보사에서 일을 하면서 동급생들에게 글을 괜찮게 쓴다는 평을 받은 적은 있으나 이렇게 오피셜한 칭찬은 처음이었던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내가 정말 그 정도로 최악의 평가를 받았어야 했던 걸까?
지금까지 스스로 했던 비교와 평가에서 항상 최악의 평가를 받아왔던 내가 남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니 천운이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에서 가장 낮은 가치로 나를 평가했던 회사에서 회사 안 사람들은 반대로 한 분 한 분 나를 향해 좋은 평가를 이어주길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가치가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한심한 사람. 150만원을 받아 마땅한 사람. 어리고 자기혐오의 덩어리였던 내가 누구보다 앞서 나 자신을 하대할 때 사용했던 단어이다.
이런 혐오 감정에서 나를 벗어나게 만들어준 이는 내 자신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에서 같이 150만원을 받아갔던 동료들이었다.
너가 그러면 그렇지.
내가 그토록 내 자신을 낮췄던 이유는 하나였다. 기대를 하면 무서우니까.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을 누구보다 아니까. 그래서 가상의 나라는 자기 방어 기재를 만든 건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가상의 나는 미래의 나였다. 현재의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도 만족스럽지 못한 존재였으니까.
그런 나에게 이곳에서 받는 인정은 무엇보다 효과 좋은 특효약이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도 타인에게 인정 받을 만한 점이 하나라도 있었구나.’ 이 하나의 사실은 내가 현재의 나에게 기대를 할 수 있는, 자기 혐오라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자기혐오라는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150만원을 받는 직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첫 회사에 다닌 지 4개월, 이제는 여기가 이상한 곳이라는 깨달아도 수십 번은 깨달아야 되었을 시점, 짧은 시간 정든 동료들이 있었음에도 '여기는 아니다'며 나갈 결심이 설 무렵 부장님에게 한 가지 제안이 왔다.
'너 나랑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