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오리 Sep 12. 2022

일그러지는 일상의 단면에 서 있는 사람들

서평 <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소설집 (문학동네, 2021)

<어쩌면 스무 번>은 소설가 편혜영이 2015년부터 2020년에 걸쳐 다양한 지면에 발표한 단편을 엮은 소설집이다.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편혜영은 단편집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소년 이로>,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 <죽은 자로 하여금> 등을 집필했다. 일상에 존재할 법 한 냉혹한 현실을 가감없이 펼쳐보이는 편혜영의 스타일은 이 작품집 곳곳에 잘 녹여져있다.


작품집에는 모두 여덟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표제작이자 치매를 앓고 있는 장인과 함께 시골에 내려온  부부의 이야기 ‘어쩌면 스무 번’, 자신을 괴롭히던 사촌형의 죽음에 부채를 가진 ‘운오’가 겪는 하루 ‘호텔 창문’, 부대 내 비리로 인해 소령으로 전역한 남자가 과거의 부하를 만나게 되는 ‘홀리데이 홈’, 고교동창의 집에서 지내던 주인공이 집주인인 친구가 사라지면서 과거의 상흔을 떠올리는 ‘리코더’.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외국에서 사는 딸의 집에서 의문의 전화를 받고 외면해왔던 것을 마주하게 되는 ‘플리즈 콜 미’, 입양아의 친모로 자신의 이름이 도용된 주인공이 고향에 돌아와 겪는 일들 ‘후견’, 안정된 노후를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던 어머니가 일으킨 사고로 모자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좋은 날이 되었네’, 어려운 환경에도 미래를 위해 들었던 보험이 해지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열 살 아이의 시선 ‘미래의 끝’이 수록작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요약되기 어려운 진폭을 보여준다. 작가는 상황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여주기만 하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때로 그조차 충분하다지 않다고 느껴지게 된다. 작가가 유예한 정보는 독자로 하여금 상황파악에 대한 갈증을 일으키고, 주어진 텍스트를 통해 인과관계를 유추하고 비어있는 부분을 상상해 넣게끔 만든다. 이 과정에서 편혜영이 전달하는 정보의 타이밍은 치밀하게 계산되어있다. 별일 없는 일상이 주는 나른함이 뒤집히는 순간 독자는 ‘나’를 배신하는 운명의 발길질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병원에 틀어박힌 채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도통 입을 열지도 않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그 시간표 중 어느 지점이 먼저 일그러졌는지, 어머니 삶에 어떤 틈이 생겼는지 곧 알게되리라는 두려움에 빠졌다. 겁이 났다. 이제부터 내가 알아가야 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p. 191, ‘좋은 날이 되었네’) 


일상을 일그러뜨리는 사건들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아 분명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고등학교때 일어난 강당 붕괴사고로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었던 수오와 무영은 잘 지내는 듯 보였지만 회사에서 일어난 인명사고 이후 수오는 잠적한다. 주인 없는 집에 혼자 남은 무영은 과거의 일을 곱씹으며 수오를 기다린다. ‘그저 지금의 삶을 얼마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하필 이런 식으로 떠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생각해야만 견딜 수 있었다.’(p.113, ‘리코더’) 사건이 남기는 서늘한 감정에 방점을 찍는 편혜영의 소설은 스릴러의 형식을 차용했을 뿐 스릴러는 아니다. 작품이 가진 장르적 특성은 다른 작품과 구별되는 편혜영만의 표식과 같다. 또한 많은 단서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는 그의 단편은 어쩌면 비선형적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퍼즐을 맞추듯 상황을 재구성하며 그의 등장인물들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따라가게 된다. 편혜영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촘촘하게 박혀있는 디테일과 일상의 서늘한 공포가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그의 소설이 버거울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독서경험이 될 수 있기도 하다. ‘동방생명 아줌마가 되는’ 꿈을 가졌던 작가가 일하는 여성에게서 받은 위로와 다정함을 작품에 담은 ‘미래의 끝’은 지금까지의 편혜영 작품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다. 편혜영이 보여줄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기대를 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윤리적 선택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