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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광 Oct 03. 2023

파이란白蘭

동해는 내가 살던 곳과 가까웠다. 이따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을 적에 혼자 차를 빌려 여기저기 다니곤 했지만 나에겐 동해만한 곳은 없었다. 학생 때야 학교 기숙사 바로 앞에서 듣는 뱃고동 소리가 부산 앞 바다였고, 지금 사는 곳은 서해와 가깝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한 곳은 동쪽 바다다. 계곡이나 산이 좋았던 나였지만 동생과 친구와 함께 했던 이따금 들른 동해 바다는 왠지 모르게 더 따뜻하고 애틋한 마음이다.


휴가로 바다를 다녀온 적이 있다.


여름 바다는 왠만해선 들어가질 않는다. 짜고 끈적 거리는 그 느낌과 모래 사장에서 달라 붙은 모래들이 느낌이 영 취향이 아니여서였다. 다행히 요 몇년 사이에는 그 끈적임과 모래 사이를 맨발로 딛고 혹은 모래사장을 뛰는 그 느낌이 참 좋아졌다. 오히려 계곡 보다도 이젠 더 좋다.


오랜만에 친구와 찾은 바다에서 서핑을 했다. 난생 첫 서핑을 강의 받으며 물살이 내 몸을 가르는 기분이 참 좋았다. 강의가 끝난 후 서핑에 기대어 바다에 누워 있자니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친구의 한 마디에 더 잘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헤엄을 잘 친다는 이야길 전했다. 어려서부터 물장구를 잘 치기도 했고 수영도 꽤 오래 했던터라 자신만만 했다. 더욱이 파도가 해안쪽으로 밀려 온다는 생각에 몇번 패들링을 해도 그리 멀리 가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팔을 저어 조금 더 멀리 나갔다. 내 생각엔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밀어치는 파도를 살피고는 이때다 싶어 열심히 패들링을 하고는 테이크 오프 자세를 취했다. 레슨 때도 취약했던 왼손이 힘을 잃고 이내 바다로 빠졌다. 그리고 순간 알아 차렸다. 아, 나 죽는구나.


바다에 빠지고 보통은 내 키에 맞거나(적은 키는 아니다) 조금 깊더라도 발을 차고 위로 올라 올 수 있는 지점에서 보딩을 했는데, 전혀 발이 닫질 않아 1차로 당황 했다. 겨우 물 위로 올라 왔는데 이미 슈트 안으로 가득찬 물 때문에 가라 앉아 2차 당황을 했다. 밑으로 가라 앉으면서 바닥을 보니 새 파랬다. 거기서 3차 당황을 했다. 여태 모래 사장이었던 하얀 바닥 옆에 시퍼런 장면이 펼쳐지니 무서울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패들링을 몇 차례 했던터라 어깨 힘은 빠졌고 물 안에서 물장구만 치고 있었다. 겨우 올라간 해수면에서 차마 친구에게 살려 달라는 말을 바로 할 수가 없어 "나 숨이 안 쉬어져"라는 말만 하고 다시 입수를 했다. 어릴 때 수영을 배우면서 물에 빠지면 호흡을 하지 말라던 말이 기억나 입에 잔뜩 숨을 들이 마시고는 들어갔다가 다시 올라오니 친구가 "발에 묶인 보드 끌어 잡어"라는 소리를 들었고 곧장 그걸 끌어 잡았다. 겨우 헤엄쳐 나오다가 보드를 잡고는 한숨을 돌리는데 온 몸에 닭살이 돋고 몸이 춥고 경직 되었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려고 물을 트는데 물에 살을 댈 수가 없었다. 한참을 물만 틀어 놓고 기다리다가 얼른 씻고는 틀어져 있는 물을 바라 봤다.


'아, 나 살아 있구나'


.


간만에 영화 파이란을 봤다.



얼추 10번은 본 듯하다. 뭣도 모르는 고등학교 시절, 20대 초반을 거쳐 b급 감성을 사랑했던 친구를 사랑했기에 다시 보았던 이후 지금이 처음이다. 대충 줄거리는 알기에 이번엔 주인공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위주로 스킵해 가며 정독했다.


여자는 남자를 쫓고, 남자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다.


영화의 큰 줄기는 이렇다. 여자는 남자를 쫓고, 이후 남자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다. 무게는 저마다 다르지만 영화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 남자쪽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그 전에 여자가 남자를 쫓았던 흔적들을 오마쥬 한다. 서로 만날 일도, 마주칠 일도 없어 보인다.


그런 그들도 만남을 준비한다.

여자는 언젠가 만날 그댈 생각하며 편지를 남기고

남자는 여자가 담은 편지에 남은 흔적을 찾아.


강재에게 쓰는 편지. 그 움직임이 참 아름답다.


예나 지금이나 동해 바다 기찻길은 참 마음에 남는다.


.


지난 경험과 다시 본 파이란의 오버랩은 꽤나 충격이면서 굴레 또한 벗어나게 해준다. 고민이 많아 잠을 설치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아지는 일들,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혼자 있는 시간. 필요하다. 혼자만을 위한 시간이 오면 언제부턴가 영화를 찾기 시작한다. 영화가 초중반쯤 지나면 안다. 그 사람, 그 경험, 그 기억들이 재해석 되는 지점을. 아마 그 지점, 나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달려온 시간(과정)이 처참히 무너지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틈'이 보이는 그 순간이 오는 경험. 그 애씀은 다시 회복하는 기분이다.


이전에 읽었던 파이란이 그저 b급 감성에 만취한 채 벗어나지 못한 '나만의 세계'로의 잔재라면,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의 파이란은 이젠 '너의 세계로 가는 한 걸음'을 이야기 해주는 기분이다. 적어도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자신의 언어 대신 너의 언어로, 네가 보지 못하는 지금을 보길 기대하는, 결국 언젠가는 나를 보아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편지에 담았다고 본다. 그래서 일까. 그녀가 편지를 쓰는 모습,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모습, 그 편지를 읽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 마치 그녀의 편지를 가방에 넣고 다니던, 근심과 불안과 행복과 기쁨 사이를 넘나들었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영화의 여자 주인공의 편지에 대한 남자 주인공의 답장은 포스터에 담긴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물에서 뭍으로 나오니 영화가 다시 보인다. 영화보다는 포스터의 글귀가 마음에 담기는 경험이 나에겐 충만한 경험이다.


.


세상은 날 삼류라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더 이상 삼류가 아니다.
사랑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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