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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덩굴 아래서, 밀밭 사이에서

귀족의 무덤(2): 세네페르 & 멘나 - 농업을 기록하다

by 나그네 한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집트 문명을 떠받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웅장한 신전, 강력한 파라오의 권위, 찬란한 무덤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농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왕에게 바쳐질 공물을 조달하고, 신전의 제사에 필요한 곡식을 준비하며, 백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것이 이집트 사회를 떠받치던 농업 관리들의 임무였다.


그렇다면 농업을 담당했던 왕실 관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냈고, 어떤 책임을 짊어졌으며, 농부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그 질문 속에서 두 인물이 떠올랐다.


한 사람은 세네페르(TT96). 그는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테프 2세 시대에 활동하며 신전과 왕실의 풍요를 책임진 인물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멘나(TT69). 그는 아멘호테프 3세 시대에 농부들과 직접 호흡하며 밭을 관리하던 사람이었다.


둘 다 같은 나일강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들의 삶은 조금 달랐다. 한 명은 왕의 신전에 공물을 바치는 삶을 살았고, 다른 한 명은 직접 밀밭을 걸으며 노동자들의 수확을 감독했다. 그들이 남긴 벽화 속에는 풍요와 노동, 권력과 책임, 그리고 나일강이 준 축복이 담겨 있었다.


이제,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 한다.


세네페르 – 왕의 신뢰를 받은 귀족


세네페르 무덤 안(TT 96)


세네페르는 왕실과 가까운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무덤 벽화를 보면 포도덩굴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그는 언제나 넉넉한 미소를 띠며 아내와 함께 등장한다. 그의 삶에는 풍요로움과 안락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왕의 신전을 관리하며 신에게 바쳐질 공물을 감독했다. 아침이 되면 그는 깨끗한 옷을 입고 신전으로 향했다. 신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곡식과 가축, 와인과 향료가 얼마나 잘 보관되고 있는지를 점검했다.


때때로 그는 신전에서 멀리 떨어진 포도밭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농부들은 서둘러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올해는 나일강의 물이 넉넉해 포도 맛이 아주 좋습니다."


세네페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알이 영그는 포도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포도송이는 그가 다스리는 땅의 풍요를 보여주는 듯했다.


"좋다. 이 포도들은 신께 바쳐질 것이니 정성껏 따도록 하게."


세네페르는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농업이 왕실과 신전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벽화에는 그가 포도밭을 거닐며 감독하는 모습이 등장하며, 이는 농업이 단순한 생산을 넘어 중요한 관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신전의 공물을 철저히 관리한 만큼, 그가 농부들의 노동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무덤에 남은 풍요로운 벽화는 그가 농업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의 벽화 속 장면들을 보면, 그가 부유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아내인 '세네트네페르트(Senetneferet)'와 함께 있는 장면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부부의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고, 신전과 가족을 동시에 지키려 했던 사람처럼 보인다.



멘나 – 땅 위에서 직접 일하는 관리자


멘나의 무덤 안(TT 69)


멘나는 세네페르와는 조금 달랐다. 그 역시 농업과 관련된 관리였지만, 신전보다는 직접 땅을 일구는 농부들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의 벽화에서는 실제로 밀과 보리를 거두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수확을 기다리는 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아침 일찍 밭으로 나갔다. 땡볕 아래에서 농부들이 낫을 들고 곡식을 베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노동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봐, 그쪽은 너무 느려! 해가 지기 전에 다 베어야 할 텐데!"


농부들은 서둘러 손을 놀렸다. 그들의 피부에는 땀이 흘렀고, 옷은 먼지투성이였다. 하지만 멘나는 그들을 단순한 노예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는 늘 철저한 사람이었다. 왕에게 보고해야 하는 수확량을 정확히 맞춰야 했고, 농부들에게도 규칙적인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했다. 그가 일반인들에게 잔인한 관리였는지, 아니면 좋은 주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공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벽화에는 저울질하는 장면이 있다. 농부들이 거둬들인 곡식을 정확하게 측량하는 모습이다. 그는 신전에 바칠 공물과 백성들이 가질 몫을 철저하게 계산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다가와 말했다.

"주인님, 올해는 물이 너무 빨리 빠져서 수확량이 적습니다. 조금 더 곡식을 남겨 주실 수 없을까요?"


멘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왕에게 보고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산을 해 보더니,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


"좋다. 이번엔 조금 덜 걷어 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내년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농부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멘나는 철저한 관리자였지만, 때로는 현실적인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네페르와 멘나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의 삶은 조금씩 달랐다. 세네페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포도밭을 거닐었고, 아내와 함께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멘나는 밭에서 농부들과 함께하며 노동과 수확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일강의 축복을 받았다는 점만큼은 같았다. 나일강이 주는 물이 없었다면, 그들의 부와 권력도 없었을 것이다. 벽화 속 그들은 왕을 위해 일하는 충성스러운 관리였고, 때로는 농부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어떤 주인이었는지는 이제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남긴 그림 속에서 그들이 기억되고 싶은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집트 나일강 주변의 농촌들


나일강이 범람하면, 이집트 땅은 다시 태어났다. 진흙과 물이 뒤섞이며 새로운 생명의 터전이 되었고, 강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비옥한 토양이 남았다. 바로 이 축복 덕분에 이집트 문명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을 기록한 두 개의 무덤 속 풍경은 어땠을까?


푸른 포도덩굴 - 세네페르 무덤

세네페르의 무덤에 들어서는 순간, 천장을 가득 메운 포도덩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른 무덤들과 달리, 이곳은 마치 한적한 정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푸른 잎사귀가 무성하게 뻗어 있고,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그 아래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포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왕과 귀족만이 즐길 수 있는 사치품이자 신들에게 바치는 신성한 공물이었으며, 풍요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세네페르의 무덤 천장에 가득한 포도덩굴은 그가 사후에도 그 풍요를 누리고 싶었던 마음을 보여준다.


세네페르가 생전에 포도 농장을 소유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분명 포도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상징하는 풍요로움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후의 세계에서조차 자신만의 포도 농장을 갖고, 직접 포도를 따먹으며 안락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네페르의 무덤 벽화 속에서 그와 아내 '세네트네페르트(Senetneferet)'가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은 유난히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대 이집트의 무덤 벽화는 보통 망자가 신에게 바치는 공물과 장례 의식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장면은 다르다.


이들은 단순한 의례적인 모습이 아니라, 마치 현실의 삶을 그대로 이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내 '세네트네페르트(Senetneferet)'는 양손으로 정성스럽게 공물을 바치고 있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푸른 포도, 탐스러운 무화과, 향긋한 빵과 과일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그릇은 풍요와 사랑의 상징이다.


남편 앞에 무릎을 살짝 굽혀 앉아 있는 그녀의 눈빛에서는 존경과 애정이 동시에 묻어 나온다. 세네페르는 이에 화답하듯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는 한 손을 가슴 쪽으로 가져가고, 다른 손은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얹고 있다. 단순한 감사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 곁에 있는 그대에게 만족한다"는 듯한 모습이다. 벽화 속 그의 검붉은 피부는 햇볕 아래서 활동하던 귀족 남성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그 태도에는 엄격함보다 온화함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포도가 포함된 공물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포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포도로 만든 와인은 왕과 신들에게 바쳐지는 귀한 공물이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쉽게 닿을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세네페르는 사후 세계에서조차 포도덩굴 아래에서의 풍요를 꿈꿨다.


그는 왕에게 올릴 공물을 받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앉아 평범한 한 끼를 나누는 모습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부와 권력의 과시가 아니다. 그가 남기고 싶었던 것은 삶을 누리는 기쁨,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내와 함께 남긴 이 벽화 속 모습은 단순한 무덤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네페르가 꿈꿨던 사후 세계, 그리고 그의 삶과 사랑을 담은 마지막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멘나의 무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벽에는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농부들, 타작을 하는 모습, 그리고 가축을 돌보는 장면이 연이어 펼쳐져 있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벽화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삐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의 노동이 이집트의 풍요를 이루는 중요한 과정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멘나는 단순한 감독 이상의 존재로 보인다. 그는 직접 농부들의 작업을 살피며, 모든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되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곡식을 타작하는 장면에서는 농부들의 근육과 동작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멘나가 농업 생산 과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네페르가 자연의 선물과 풍요를 기념했다면, 멘나는 그 풍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기록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그의 무덤 벽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한 시대의 경제 구조와 노동의 가치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멘나는 자신의 공적을 파라오에게, 그리고 후대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벽화 속 멘나의 모습은 단호하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농사의 흐름을 조율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실제 그가 맡았던 역할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좋은 감독이었을까, 아니면 엄격한 관리였을까? 벽화 속 노동자들의 표정은 대체로 중립적이지만, 그들의 자세나 동작에서 부지런함과 질서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도 그는 강한 책임감과 효율적인 관리로 왕실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벽화를 통해 우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한 시대를 살아간 한 인간의 가치관과 목표를 엿볼 수 있다. 멘나는 풍요로운 수확의 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손길과 노력을 기록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무덤 벽화는 노동의 중요성을 후대에 전하는 하나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나일강을 따라 걷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농촌


나일강을 따라 걷다 보면, 현재와 과거가 겹쳐지는 순간이 있다.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지만, 강바람이 먼지를 가라앉히며 부드럽게 스친다. 들판에는 허리를 숙여 작물을 돌보는 농부들이 있고, 강가에서는 물을 긷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디선가 소달구지가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그 길 위에서 나는 문득 생각한다.


이 길은 단순한 현재의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치 시간의 틈이 열려,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얽힌 듯한 기분이 든다.


이집트 농촌의 포도 농장


나일강을 따라 펼쳐진 초록빛 포도밭. 햇살이 잎사귀 사이로 비쳐 들어 반짝였고, 굵직한 포도송이가 덩굴 아래에서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 이어진 포도나무 터널은 태양을 가려주었고, 그 아래에서 농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에 흰 천을 두르고, 구릿빛 피부에 땀방울이 반짝였다. 그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조심하시오! 익지 않은 포도가 떨어질지 몰라요."


나는 흠칫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단단하군요. 너무 서두르면 안 되지만, 너무 늦으면 새들이 먼저 먹어버립니다."


나는 포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포도는 언제 수확하나요?"


그는 손끝으로 포도 한 알을 조심스럽게 눌러보았다.


"아직 덜 익었소. 보시오, 단단하지 않소? 하지만 너무 오래 두면 새들이 먼저 먹어버리니 적당한 때를 잘 맞춰야지요."


나는 다시 벽화 속 포도밭을 떠올렸다. 벽화 속 농부들도, 오늘의 농부들도 같은 태양 아래서 같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포도들은 어디로 가나요?"


그는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와인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하고, 일부는 시장으로 가고, 또 일부는 그냥 이렇게 따서 먹기도 하지요. 당신도 한 알 맛보겠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직 덜 익었다면서요."


그는 껄껄 웃더니, 바구니 속에서 작은 송이를 꺼내 손으로 문질렀다.

"요건 잘 익은 것들이오. 한번 맛보시오."


나는 조심스럽게 포도를 집어 입에 넣었다. 터지는 순간, 진한 단맛이 퍼졌다.

"정말 맛있네요!"


그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이 맛이 바로 나일강의 축복이오."


나는 다시 벽화 속 포도밭을 떠올렸다. 신전에 바치기 위해 공들여 관리했던 포도밭, 벽화 속에서 영원히 수확되는 장면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서 같은 태양 아래 같은 손길로 길러지고 있는 포도들.


이집트 농촌의 모습들


조금 더 걸어가니, 나일강 근처에서 농부들이 허리를 숙여 밭을 매고 있었다. 넓은 밀밭이 태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낫을 든 남자들이 한 줄씩 곡식을 베어 나갔고, 다른 농부들은 묶인 볏단을 지게에 지고 수레로 옮기고 있었다.


나는 한 농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밭의 밀은 언제 수확하나요?"


그는 일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곧 말라비틀어지기 전에. 나일강이 물을 주는 동안은 잘 자라지만, 해가 너무 뜨거우면 순식간에 바짝 마르게 되지요."


그는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내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나는 벽화 속 농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곳 무덤 속 벽화를 보고 있었어요. 거기에도 당신처럼 밀을 수확하는 농부들이 그려져 있더군요."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 멘나의 벽화 말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에도 소를 몰고 밭을 가는 사람들, 곡식을 자루에 담아 저울에 올리는 모습이 있더군요. 당신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더군요."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들도 나처럼 햇빛 아래에서 땀 흘렸겠지. 나일강이 주는 땅을 돌보면서."


그때, 멀리서 소달구지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 마부(馬夫horseman)가 가느다란 채찍을 가볍게 흔들자, 짐을 가득 실은 당나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수레 위에는 볏단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마치 벽화 속 한 장면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마부는 주름진 얼굴에 해사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시장으로 갑니다. 거기서 곡식을 팔고, 필요한 것들을 사 올 겁니다."


나는 문득 벽화 속 장면을 떠올렸다. 저울에 곡식을 달고, 수확한 작물을 나누는 장면. 과거에도, 지금도, 이 땅의 농부들은 나일강을 따라 곡식을 거두고, 짐을 실어 시장으로 향했다.


벽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도 계속되는 삶의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 무덤 벽을 바라보았다. 수천 년이 지나도 이집트의 농부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손으로 포도를 따고, 태양 아래에서 바구니를 나르고, 시장으로 가는 수레를 모는 모습. 밀을 베고, 볏단을 묶고, 나일강이 흐르는 한 땅을 돌보는 사람들.


벽화 속 농부들과 오늘날의 농부들.


그들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일강이 흐르는 한, 이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질문으로 글을 시작했다. 세네페르의 무덤에서 포도덩굴이 드리운 벽화를 바라보며, 그리고 멘나의 무덤에서 황금빛 들판을 지켜보며 나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무엇이 그들의 삶을 지탱했고,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겼을까? 어쩌면 그 답은 그들이 남긴 마지막 흔적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세네페르는 나일강을 따라 배를 타고 여행하는 장면을 남겼다. 강물은 부드럽게 흐르고, 그의 표정은 평온하다. 그는 사후에도 풍요로운 정원과 포도밭을 거닐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의 무덤은 단순한 영광의 기록이 아니라, 그가 바라던 삶의 지속이 담긴 공간이었다.


멘나의 무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벽화에는 오시리스 심판과 심장 저울질이 등장한다. 그가 살아온 삶의 무게가 저울 위에 올려지고, 신들이 그의 행적을 평가한다. 그는 사후에도 책임을 다해야 했다. 신의 심판대 앞에서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증명해야 했던 것일까?


나는 멘나의 무덤 벽화를 떠올리며, 과거 내가 방문했던 이집트의 농촌을 다시 생각한다. 나일강은 여전히 흐르고, 농부들은 들판을 가꾼다. 손으로 흙을 만지고, 곡식을 거두며,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수천 년 전과 다르지 않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되어 같은 삶을 반복하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왕의 권위도, 웅장한 신전도 아니었다.



나일강이 흐르듯, 그들의 삶도 멈추지 않기를. 그들이 가꾸었던 땅, 수확했던 곡식, 그리고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기를. 그리고 오늘, 나는 같은 강물을 바라본다.


강이 흐르고, 농부들이 땅을 일구고, 햇빛 아래 곡식이 익어간다.


과거와 현재는 함께 살아간다. 이곳에서는, 삶이 곧 영원이다.




사진: 나그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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