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 엘 아마르나, 사라진 신의 도시를 걷다
룩소르를 떠나는 아침, 나는 창밖으로 마지막으로 신전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여전히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고, 카르나크의 오벨리스크는 그 빛을 받아 조용히 반짝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 도시의 숨결을 뒤로한 채, 나는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었다.
"아크나톤".
그가 걸어간 길을 따라, 나는 잊힌 도시 텔 엘 아마르나를 향해 떠났다. 태양만을 신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했던 파라오, 그가 세상과 단절된 곳에 세운 도시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길고, 더 조용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 차 안의 공기는 어둡고 묘하게 긴장돼 있었다.
룩소르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차 한 대가 앞을 가로막더니, 우리 차를 앞세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차가 우리 가이드래.”
운전기사가 웃으며 말했지만, 웃음의 끝은 가늘게 떨렸다.
“왜요?”
내가 물었다.
“여기선 외국인이 멀리 이동할 땐 경찰이 꼭 따라붙어요. 사고도 많고, 납치 사건도 있었거든요. 특히 이쪽, 미냐 쪽은 조심해야 해요.”
도로는 바위 절벽 사이로 나 있었다. 바위를 잘라 만든 길, 사막이 끝난 듯하면서도 또 다른 사막으로 이어지는 느낌. 동행이 창밖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크나톤도 저렇게 길을 내며 갔을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는 길을 낸 게 아니라, 세상에서 멀어지기 위해 길을 버렸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웃었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 않았다. 주변은 너무 조용했고, 바람마저 멈춘 듯했다. 고요한 풍경 속, 낡은 도요타 트럭이 우리를 앞질렀다. 짐칸에는 나뭇가지 더미와 기름통이 어지럽게 실려 있었다. 운전석에는 햇빛에 바랜 갈색 갤라비야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고, 창틀 위에는 오래된 물병이 삐딱하게 놓여 있었다.
그가 우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곧 시선을 돌렸다. 잠깐, 우리와 그 사이에 벽이 생긴 느낌이었다.
한참을 달리다 초록이 나타났다. 밀밭인지 사탕수수인지, 초록 물결이 바람에 따라 살랑거렸다.
“여기선 초록이 귀하잖아요.”
동행이 말했다.
“그러게요. 나일강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죠.”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야자수가 흔들리고, 멀리서 물 냄새가 풍겼다. 우리는 나일강 옆 도로를 따라, 오래된 풍경을 따라갔다. 도시가 보였다. 민야(Minya).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솟은 미나렛이 하늘을 찔렀고, 하늘은 이미 정오처럼 밝았다. 하지만 도시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로변에 줄지어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손을 흔드는 아이들, 경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어른들. 그들 사이를 지나며, 우리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전통 벽돌로 쌓은 담장을 끼고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한 아이가 갑자기 우리 차를 향해 달려오더니 멈춰 섰다. 눈이 맑고 컸다.
“Where are you going?”
영어는 아니었지만, 물음은 분명했다. 창문을 내리고 대답했다.
“텔 엘 아마르나에 가.”
그 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텔… 아마르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그 아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친구들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저 바위산 너머, 아크나톤이 세운 도시.
세상의 모든 신을 버리고, 태양 하나만을 향해 지은 수도.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 도시로 가고 있을까.
경찰차는 여전히 앞에서 우리를 이끈다. 그 뒤를 따라, 사라진 도시를 향해 우리는 조용히 달려간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그러나 꼭 한 번은 만나야 할 곳으로.
길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은 멀었다. 이동만으로 몇 시간이 흘렀고, 도착했을 즈음엔 뺨으로 떨어지는 햇살이 맹렬했다. 그늘 하나 없는 황톳빛 벌판 위에 나는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이곳이, 한때 이집트의 수도였다니. 파라오가 살았고, 신이 예배받았고, 백성들이 이 땅에 기도를 새겼다니.
텔 엘 아마르나.
정확히 말하면, "아케트아텐(Akhetaten)."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곳은, 아크나톤이 오직 태양만을 섬기기 위해 세운 도시다. 그 중심에 선 것이 바로 아텐 사원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구조물은 거의 없다. 흙벽돌 무더기, 기단만 남은 제단, 바닥 위 돌기초들. 웅장한 신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진짜 아텐 신전인가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들은 가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예요.”
그는 짧게 말했다.
“이게 전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아크나톤은 이곳에 사원을 지었는가?
왜 그는 룩소르를 떠났는가?
주변은 조용했다. 흙더미를 쓸고, 사진을 찍고, 메모하는 연구자들의 움직임만이 유일한 대화였다. 관광객의 웃음소리도, 가이드의 확성기도 없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신기한 유물이 아니라, 잊힌 질문을 다시 묻는 이들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작업복을 입은 고고학자 몇 명이 벽면을 살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 젊은 학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크나톤은 아문 사제를 피하려고 이곳으로 왔다고 하죠. 하지만 그건 반만 맞는 말이에요.”
“그럼 왜 왔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묻자 그는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아무도 살지 않던 땅이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 그는 신을 새로 세우려 했고, 그러려면 장소도 새로워야 했던 거예요. 룩소르는 너무 많은 신의 목소리가 얽혀 있었어요. 그는... 침묵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의 말에 나는 묘하게 울컥했다.
빛과 침묵.
그가 아텐에게 바치고자 했던 건, 찬란한 빛뿐 아니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땅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텐 사원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보통의 이집트 신전이라면, 그 중심에는 어두운 성소가 있어야 한다. 태양의 빛이 닿지 않는, 닫힌 공간. 하지만 여긴 달랐다. 지붕이 없다. 벽도 반쯤 무너졌다. 햇빛은 사방으로 떨어졌고, 나는 마치 빛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웅장하지 않음이 오히려 나를 감쌌다. 그 순간, 나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그는 룩소르를 떠났는지를.
그는 신전의 장막을 걷고 싶었던 것이다. 그림자와 신비, 두려움과 제의로 가득했던 신앙을 벗기고, 단순한 빛과 열, 생명 그 자체로 신을 다시 만나고 싶었던 것.
아크나톤이 원한 것은 신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늘 아래 자연스럽게 서는 공간,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한 연구자가 내 옆에 섰다.
“이 기둥들 보이시죠?”
그는 2개 남은 돌기둥을 가리켰다.
“원래는 모두 꽃봉오리 모양이었어요. 아텐의 빛이 이 기둥 사이로 쏟아지게 만들었죠. 이건 무너진 신전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 사이에 놓인 투명한 통로였어요.”
나는 중앙에 서서 눈을 감았다. 빛이 이마를 쓸고, 볼을 감쌌다. 눈을 감은 채로도 모든 것이 보이는 듯했다. 지금도 저편에서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실패했다. 그의 종교는 오래가지 못했고, 신전은 무너졌고, 도시는 잊혔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룩소르에서 등 돌리고 떠난 그 발걸음 속에는, 무너짐조차 감수하겠다는 용기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혼잣말로 다시 그 질문을 되뇌었다.
“왜 그는 이곳에 사원을 지었을까…”
그리고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신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 함께 숨 쉬기 위해서였을지도 몰라.”
- 텔 엘 아마르나의 '후야'와 '메렐레'를 만나다.
사람들은 이곳에 거의 오지 않는다. 수많은 이집트 유적 중에도 이 무덤은 찾아오기 힘든 곳에 있고, 한 번 찾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런 곳이다. 지도에 표시된 관광지마저 아니고, 안내판 하나 없이 바위산의 언저리에 숨어 있다.
모래바람은 여전히 이 바위를 핥고 지나가며, 수천 년 전의 삶을 조금씩 더 지우려 애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바위산을 오르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나는 그들—후야(Huya) 혹은 메렐레(Merire)—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후야는 네페르티티의 아버지로, 왕비의 시종장, 궁전 감독관, 아케트아텐의 곡물·와인 관리 책임자였다. 메렐레는 아텐 신앙의 대사제이자 예배 책임자, 아크나톤의 신정(神政)을 실제로 실현하던 신앙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들은 단지 아크나톤 곁에 있던 사람이 아니라, 그의 이상을 실현했던 손발이자, 그의 신념을 공유했던 조력자들이었다.
나는 바위 안으로 파낸 무덤 입구 앞에 멈춰 섰다. 햇살은 그늘을 만들지 못했고, 계단 아래엔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 길, 사람의 발자국이 마지막으로 찍힌 게 언제일까…”
입구 철문은 녹슬어 있었고, 안쪽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먼지보다도 더 두터운 고요가 나를 감쌌다.
벽에는 그들이 남긴 장면들이 있었다.
아크나톤, 네페르티티, 그리고 어린 공주들.
그들은 모두 고요한 자세로,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손끝은 높이 들려 있었고, 그 손끝이 닿은 곳에는 햇살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햇살은 단순한 직선이 아니었다. 아텐, 즉 태양 원반에서 길게 뻗어 나온 그 선들은 마치 살아 있는 손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처럼 뻗어 있었다. 그 손은 각각 ‘앵크’, 생명을 상징하는 기호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앵크는, 왕의 코에, 네페르티티의 콧등에, 아이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신이 생명을 불어넣는 순간.
그것은 제물이 피를 흘리는 장면도, 제사장이 향을 피우는 장면도 아니었다. 이 장면엔 피가 없었다. 불도, 굿도, 주문도 없었다. 오직 빛이, 숨처럼 전달되고 있었다. 그 장면 앞에 선 나는 어느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치 나 또한, 그 햇살 한 줄기에 생명을 받고 있는 것처럼.
눈을 감자, 태양은 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와 내 이마와 가슴을 데웠다. 빛이 호흡이 되었고, 신은 공기가 되었다.
그때였다.
어두운 벽 안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공기 중에 떨림이 있었다.
진동도, 메아리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오래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한, 사라지지 않은 말 한 조각이 날아와 귓가에 걸렸다.
“우리는 진심이었소.”
나는 고개를 돌려 벽화 저편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냥 마음속의 메아리라 하기엔, 그 울림은 그림 속 그들의 눈빛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우리는 빛이 영원할 거라 믿었지요. 왕과 신이 하나 되어, 다시는 어둠이 세상을 덮지 않을 거라…”
그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그들을 오해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아크나톤과 그의 사람들을 종교 개혁가, 철학자, 반역자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린 이 그림 앞에 서보니, 이건 단순한 정치적 선택도, 종교적 전략도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로 믿고 있었다.
빛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태양이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지워줄 수 있다고.
나는 조심스레 벽에 손을 댈 듯 말 듯 멈췄다. 그리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워졌죠?”
“왜 사람들은 이곳을 잊었죠?”
“왜 그토록 믿었던 빛은 이토록 빠르게 꺼져버린 거죠?”
벽은 말이 없었다.
그저 먼지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던 햇살 모양의 선 하나가, 이상하게도 그 질문에 대답하는 듯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을 뻗고 있었다.
손처럼.
숨처럼.
기억처럼.
“우리는 끝날 줄 몰랐기에,”
그 침묵은 말하고 있었다.
“지금도… 말하고 있소.”
나는 오래도록 그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 장면 속의 그들은 내게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들의 손끝은 여전히 아텐을 향해 있었고, 그 빛은 여전히, 이 폐허 속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그림은 신만이 아니었다. 한쪽 벽면에는 밀을 베고, 탈곡하고, 옮기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머리에 광주리를 인 남자, 곡식단을 옮기는 여자, 구석에 앉은 아이. 삶의 장면이다. 죽은 이가 가져가고 싶은 ‘풍요’의 상징이다.
그러나 여기선 그것이 조금 달랐다. 모든 인물은 유난히 정돈되어 있었고, 표정은 진지했다. 그들은 단순히 곡식을 베는 게 아니라, 빛이 내린 세상의 질서를 함께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더 들어가니, 장인들의 모습이 등장했다. 도구를 다듬고, 돌을 깎고, 그릇을 만드는 사람들. 그림에 남은 색은 아직도 선명했다. 푸른색과 붉은색, 황토와 검은 선들이 그들의 손과 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중 한 장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멈췄다.
마치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 단지 신을 위해 만들지 않았소. 우리는 영원히 남길 수 있다고 믿었소.”
나는 복도 깊은 곳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햇빛은 입구까지만 따라오고, 몇 발자국만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어둠이 나를 삼켜버렸다.
벽을 따라 손을 뻗었다. 차갑고 거친 감촉. 마치 오래된 뼈를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벽면 곳곳엔 움푹 파인 자국이 있었다. 조각상이 있었던 자리였을까, 아니면 무언가를 고정했던 홈이었을까.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장식은 떨어져 나갔고, 색은 벗겨졌고, 이야기마저 바람에 쓸려나간 듯했다. 공기는 묘하게 눅눅했고, 숨을 쉴 때마다 흙냄새와 함께 낯선 기운이 폐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의 태양은 이곳을 알지 못했다. 사방은 침묵으로 가득했고, 그 침묵은 내가 움직이는 소리까지도 스스로 삼켜버렸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곳에서 목소리를 내는 건 실례일 것 같았다. 말 한마디가 이 공간의 균형을 깨뜨릴까 두려웠다. 이 어둠은, 아텐의 빛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 신전의 개방된 하늘, 사방으로 쏟아지던 햇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그 따뜻함은, 여기엔 없었다. 여긴 지붕이 있었고, 닫혀 있었고, 침묵 속에서만 살아남은 세계였다.
나는 조용히 묻고 싶었다. 왜 그들은 이런 무덤을 만들었을까. 왜 이토록 깊고 어두운 곳에 삶을 숨기듯 새겨두었을까. 왜 햇살은 닿지 않는 이 벽에, 손으로 빛을 그리려 했을까. 그림도, 사람도, 신도 사라진 이 복도에서 남아 있는 것은 형체 없는 의지였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칭송받기 위한 것도 아닌, 그저 ‘남기고자 했던’ 의지.
말이 아니라, 그림으로.
이야기가 아니라, 장면으로.
돌 위에, 색으로, 손으로.
나는 고개를 들었다. 깊은 복도의 끝은 어둡고 텅 비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공허하지는 않았다. 그곳엔 남기고자 했던 사람의 마음이 아직도 앉아 있는 듯했다. 누군가 이 복도를 지나 다시 볼 거라고, 다시 기억해 줄 거라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그대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말없이, 가만히,
그 침묵과 함께 숨을 쉬며.
나는 천천히 무덤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는 순간, 눈부신 햇살이 그대로 내 눈을 찔렀다. 바깥은 여전히 뜨거웠고, 모래는 바람에 실려 무덤의 입구를 다시 조금씩 덮고 있었다. 방문객은 없었다.
아마 오늘 하루, 이 바위산 아래로 들어온 사람은 나 혼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혼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고요한 암흑 속에서 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야의 낮은 한숨.
메렐레의 묵직한 침묵.
그들의 이름은 왕조가 끝나며 함께 지워졌고, 그들의 무덤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발길에서 멀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살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속삭이는 누군가를 느꼈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 우리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나는 모래 위에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사라진 도시, 무너진 신전, 어두운 무덤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아텐의 빛은 오늘도 이곳에 비치지 않았지만, 그 빛을 그리던 사람들의 기억은, 이 땅에 남았다.
나는 다음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이집트의 수많은 유적 중에서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한 벽화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텐의 햇살 아래, 아케나톤이 전차 위에서 빛을 마주하던 그 장면.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오래된 질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빛은 왜, 가장 멀리 있는 이들에게 향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빛 아래에 서고 있는가.
사진: 나그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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