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었던 생명의 회복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두 겹으로 기억하고 있다. 먼저는 군중 사이에 묻힌 한 여인의 손끝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한 집 안의 적막함 속에서. 전혀 다른 공간, 다른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둘은 닮아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과, 어떤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 나는 그 안에서 한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갔다.
그날은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로 돌아온 날이었다. 이전에 머물렀던 마을에서는 그를 거절했다고 들었다. 그곳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그를 향해 닫힌 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호수 위로 물안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사람들은 물가에 모여들었다. 배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부터, 그들의 눈빛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무릎을 꿇었고, 누군가는 아이를 안은 채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줄곧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오신다... 그분이 다시 오신다...”
누군가 중얼이듯 말했다. 그 말은 곧 웅성임으로 번졌고, 이내 물결처럼 퍼졌다. 어깨너머로, 발끝을 디디며, 사람들은 그가 내릴 자리를 향해 모여들었다. 기다림은 곧 간절함이었다. 몸의 고통이든, 삶의 막막함이든, 그들은 각자의 절벽 끝에서 한 사람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야이로’라는 이름이었다. 회당장이었고, 그 지역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회당장은 율법에 밝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조용히 존경받는 자리에 있는 이다. 겉으론 침착했지만, 그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그의 표정도, 그의 지위도 아니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자리였다. 예수 앞에서였다.
“부탁드립니다. 내 딸이... 이제 곧 숨이 멎을지도 모릅니다. 제발, 제 집에 함께 가주십시오. 제발...”
그의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그 끝에는 오래 눌러 담은 두려움이 묻어났다. 말끝을 더 잇지 못한 그는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술렁였고, 예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야이로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뒤를 따랐다. 마치 희망이 걸어가는 길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들은 땅 위에 쏟아지는 빛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길 위는 곧 소란스러워졌다. 예수가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가려 안간힘을 썼다. 누군가는 그의 옆으로 비집고 들어왔고, 누군가는 뒤에서 밀며 따라붙었다. 좁은 길은 금세 숨이 막힐 듯 붐볐다. 팔이 스치고 어깨가 부딪혔다. 발을 헛디디는 사람도 있었고, 손끝이라도 닿아보려 팔을 뻗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얼굴은 모두 달랐다. 어떤 이는 주름 깊은 눈으로 애원하듯 바라봤고, 어떤 이는 아직 말 못 할 상처를 품은 듯 눈을 피했다. 또 어떤 이는 그저 두 눈을 반짝이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려는 눈치였다. 누군가는 속삭였고, 누군가는 소리쳤다.
“지금쯤이면 그 집에 거의 다 왔을까?” “혹시 이 길에서 무슨 일이 또 벌어지진 않을까?”
그 틈을 지나 예수는 묵묵히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짓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걸음에는 막힘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어딘가를 정확히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치 모두의 시선과 소음을 뚫고, 단 하나의 간청에 응답하듯.
그 순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여인이 그 틈에 있었다. 그녀는 몸을 낮췄고, 한 걸음씩 조심스레 다가갔다. 열두 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는 혈루증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끊임없는 출혈은 단순한 신체의 병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그녀는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단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더럽혀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율법은 그녀 같은 여인에게 손가락질만 남겨주었다. 그녀가 앉은자리는 더러워졌고, 그녀가 지나간 자리조차 정결하지 못하다고 여겨졌다. 사람과 부딪히면 그 사람도 정결함을 잃었다. 그녀가 만진 옷, 물건, 음식, 심지어 그녀의 숨결까지 피해야 할 것이 되었다. 누군가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면, 시장에서도, 길가에서도 조용한 손가락질이 따라붙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말했다 했었다.
“그 여인 근처엔 가지 마라. 손끝이라도 닿으면 안 돼.”
그래서 그녀는 이름을 잃었다. 누군가의 아내였던 시간, 누군가의 딸이었고 어쩌면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시간은, 모두 지난날의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병으로만 기억했고, 병보다 더 무거운 눈길로 그녀를 지나쳤다.
그녀는 그런 세월 속에서 살았다. 처음엔 고치기 위해 애썼다. 가진 것을 내놓았고, 희망이란 희망은 다 써보았다. 여러 의사를 만났고, 약을 썼고, 기도를 했고, 애원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같은 말이었다. 고칠 수 없다는 진단, 혹은 효과 없는 약, 그리고 점점 비워지는 집안 곳간. 시간이 흐를수록 병은 그녀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과 삶까지도 갉아먹었다.
마을 바깥 변두리에,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진 자리에서 그녀는 지냈다고 했다. 불을 피우면 연기 때문에 눈에 띌까 꺼렸고, 물을 길을 때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시간만 골라 다녔다고 했다. 그렇게 열두 해.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만큼 긴 침묵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병든 이들이 낫고, 외면받던 이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여인은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아니, 그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예수의 옷자락. 그 끝자락이라도 닿으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여인은 자신 안의 고통이 멈추었다는 것을 알았다.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었다. 몸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물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지?”
사람들은 당황했다. 누가, 왜, 어떻게? 모두가 말이 없었다. 예수 곁에는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라 불리는 이가 함께 있었다고 들었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밀치고 있습니다. 다들 선생님의 옷에 닿고 있어요.”
하지만 예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손을 대었다. 내게서 힘이 나갔음을 느꼈다.”
순간, 숨죽였던 여인이 떨며 앞으로 나섰다.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엎드려 말했다. 자신의 병, 지난 시간, 그리고 방금 있었던 그 손끝의 믿음을. 군중은 놀랐고, 그녀는 두려웠다. 부정하다고 여겨진 손이 누군가의 옷자락을 스쳤다는 것만으로도 돌에 맞을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평안히 가라.”
그 말 한마디가 모든 사람을 멈춰 세웠다. 사람들은 더는 그녀를 부정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를 정결하게 한 것은 의식도, 규례도 아니었다. 오직 믿음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소식이 도착했다.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달려왔다. 딸이 죽었다는 말이었다. 이제는 예수를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무너진 얼굴을 한 야이로를 보며 예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라. 그러면 딸이 살아날 것이다.”
그 말에 무슨 근거가 있었을까. 이미 아이는 숨을 거두었고, 집안은 울음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예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무리들을 멀리하고, 함께 걷던 몇 사람과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슬픔을 구경거리로 삼으려는 사람들, 기적을 외면보다 먼저 믿지 못하는 이들, 흥분과 기대와 소란으로 가득한 무리들을 그는 집 밖에 남겨두었다. 그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부모의 무너진 마음과, 조용히 믿고 따르는 이들의 침묵뿐이었다.
집 안은 통곡의 소리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외쳤다. 늦었다고, 이미 끝났다고. 그가 한 말은 기이했다.
“울지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실없는 웃음이었고, 조롱이 섞여 있었다.
“죽었다는데 잠이라니.”
누군가는 중얼거렸고, 또 다른 이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 현실을 모르는 건가?”
“의사도 아닌데 뭘 안다고.”
속삭임과 웃음이 뒤섞여 방 안을 채웠다. 아이가 숨을 멈췄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조용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손을 잡고, 한마디를 남겼다.
“아이야, 일어나거라.”
그 순간, 아이의 가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떴고, 일어났고, 숨을 쉬었다. 예수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모에게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부분이 내게는 가장 오래 머물렀다. 왜 그토록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 아이가 살아났다는 사실은 단지 개인적인 기쁨을 넘어, 누구든 입에 올릴 수밖에 없는 충격이었을 텐데. 그런데도 예수는 단호히 침묵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겸손이나 신중함 이상의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섣불리 결론짓는 것을 경계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이해한 이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기적을 일으키는 자, 병을 고치는 자, 무언가를 해결해 주는 존재로만 보았다. 또 어떤 이들은 그를 민족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줄 혁명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이 품었던 ‘구원’은 내면의 회복이 아닌, 외적인 해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대는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은 로마의 무거운 세금, 병사들의 폭력, 자치권의 박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일상은 불안했고, 정체성은 위협받았으며, 종교적 자유조차 감시받는 현실이었다. 민중은 오래도록 메시아를 기다려 왔다. 다윗처럼 강력한 왕, 모세처럼 억압의 체제를 부수고 백성을 이끌어낼 인물을 갈망했다. 누군가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를, 누군가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의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상징처럼 읽혔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그 일을 보며, 그가 단지 병든 한 사람만을 고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라고 믿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폭발적인 열광으로 번졌을 것이고, 정치적 혁명의 불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오해를 가장 경계했다. 그는 결코 칼을 들지 않았고, 군중을 선동하지도 않았다. 그의 길은 힘의 길이 아니라, 회복과 이해의 길이었다. 사람들의 기대가 클수록, 그 기대는 오히려 그의 뜻을 가리고 왜곡시켰다. 그래서 그는 입소문을 차단하고자 했다. 침묵을 요청했고, 감정을 조용히 가라앉히려 했다.
그는 단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그 집에 들어갔고, 그 생명의 회복이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해석으로 소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다시 숨 쉬는 일이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린 그 기적은, 말하자면 너무 커서 숨겼던 진실이었다.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 앞에서, 그는 오히려 침묵을 택했다.
나는 이 두 이야기 속에서, ‘죽음과 삶’이라는 거대한 경계를 오가는 사람을 본다. 손끝으로 닿아도 변화하는 존재, 말을 건네면 어둠을 깨우는 사람. 그는 분명히 생명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두려움보다 믿음을 택한 이들이 있었다.
그게 어쩌면 시작이었다. 누군가를 살리는 이야기의, 조용한 시작.
나는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침묵을 요청했던 이유, 무리의 열광을 멀리하고 단 몇 사람만 데리고 들어간 까닭,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건넨 짧은 말들. 그 모든 것이,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 못지않게,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이기도 했음을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는 단지 병을 고치는 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기대를 거슬러서라도, 오해받기를 무릅쓰고서라도, 생명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 했던 이였다. 그날의 침묵과 그날의 속삭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조용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여전히 생각한다. ‘기적’이라 불리는 사건 뒤에, 그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속삭임이, 나 같은 이의 마음에도 들려올 수 있을까 하고.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8:40-56"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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