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손더스, 《바르도의 링컨》
* 읽기 전
누구라도 그래야겠지만 제목에 대해서부터 알아야 했다. 우선 ‘바르도(Bardo)’. 티베트 불교에서 죽고 나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를 의미한단다. 구천(九天)을 떠돈다는 의미는 아니고, 어쩌면 다음 생을 위한 준비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단계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 다음은 ‘링컨(Lincoln)’.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링컨의 링컨이지지만, 링컨 대통령이 아니라 그의 셋째 아들(윌리 링컨)이다. 1862년 2월 장티푸스로 열 한 살의 나이로 죽은. 남북 전쟁 와중이었다.
소설의 형식도 미리 알아야 했다. 많은 부분이 실제 기록 자체를 인용하고 있다. 또 다른 부분은 바르도에 속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번갈아 들려 준다. 독특한 구성이다. 생(生)의 이쪽 기록과 그 건너편의 목소리가 맞서고 있다. 바르도에 속한 이들의 목소리만이 소설가가 창조해낸 문장들이지만, 실제 기록을 엮어놓은 것도 소설가의 몫이다. 이것 역시 소설가의 문장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 읽으면서
독특한 구성이라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익숙해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어렵지 않다. 이쪽인가, 저쪽인가는 분명히 구별되고, 이쪽의 이야기도, 저쪽의 이야기도 누구의 기록인지, 누구의 목소리인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단지 서로 다른 세상이라는 게 중요하다.
윌리 링컨은 남북 전쟁 도중 죽었다. 미합중국의 운명이 갈리는 전쟁이었다. 링컨은 전쟁의 최고 책임자였다. 공적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무거운 책임이 그에게 있었지만(그래서 많은 비난도 받고 있었다), 그는 또한 소년의 아버지였다. 아들은 연회가 펼쳐지는 하얀 돌집(백악관)의 위층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들은 묘지 납골소에 임시로 안치하고 돌아서서 전쟁을 지휘해야만 하는 대통령. 소설가는 납골소를 찾아 주검을 안아 흐느끼는 링컨의 이야기를 듣고 피에타의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의 링컨 상은 이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가? 아니 떠올릴 수 있는가?).
그러나 다시 한 소년의 목숨이 이렇게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한 전투에서 죽어간 수천의 목숨, 전쟁 동안 죽어간 수만, 수십만의 목숨은 어떤가? 대통령은 하나의 죽음에도 애통해 했고, 많은 죽음에도 애통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통함이 같은 의미였을까? 그 생각에 이르자 몸서리쳐졌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음에도, 아니 믿지 않기에 죽음 이후의 세계가 두렵다. 이렇게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다면 죽는다는 것은 허망한 일일까? 아니면 그래서 더욱 이 생애를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나를 기억하도록? 그런데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른다면, 모른다는 것도 의식할 수 없는 게 죽음이라면? 오랜만에 죽음을 생각하며 다시 몸서리쳐졌다.
* 읽고 나서
조지 손더스는 첫 장편인 이 소설로 2017년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형식상의 독창성뿐만 아니라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평가였을 것이다. 기록을 찾아내 얽어낸 수고로움도 그렇고, 유령의 목소리들을 엮어 놓은 세심함 모두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고, 그런 형식과 내용이 모두 생의 이편과 저편에 대한 질문을 하도록 한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