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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Dec 30. 2020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난기 혹은 잔인한 풍자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http://www.yes24.com/Product/goods/93992470?art_bl=13557401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즈음(《용의자 X의 헌실》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난 후였다) 그의 단편소설들을 읽었었다. 갈릴레오 시리즈였다. 이공계 출신의 추리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이력에 걸맞는 소설들이었다. 짧은 분량에 산뜻하게 사건을 전개시키고, ‘과학적으로’ 해결했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역량은 장편이 아니라 단편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2000년 초반에 (일본에서) 나온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은 다시 한번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소설이 그의 장편소설과는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교한 전개, 세밀한 묘사 같은 것은 없더라도 단숨에 정점에 올라 터트리고는 다시 내려와 또 금세 다른 언덕을 오르게 되는 느낌.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짧은 호흡 속에 자신이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놓았다. 그것도 장난스럽게.

 

다소는 과장될 수 밖에 없지만 여기 소설들에 비친 추리소설가의 모습은 여실히 현실의 추리소설가의 모습일 수 밖에 없다.

어느 해 수입이 느는 바람에 세금이 늘었는데, 그 세금을 줄이고자 쓰고 있는 소설 속에 개연성 없는 설정을 하는 소설가. 이과계 소설의 사이비 독자.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해 요상한 게임을 시작하는 소설가. 치매에 걸린 소설가와 그 소설가가 쓴 좌충우돌의 소설을 고쳐 쓰는 또 다른 늙은 소설가, 그리고 또 늙은 독자. 소설 속 살인 상황이 그대로 벌어져서 무명의 소설가가 유명해지는 이야기, 그런데 그 상황을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가. 무작정 길고 긴 소설을 강요하는 출판사와 또 그것을 마지 못해(?) 들어주는 소설가. 추리소설을 끝까지 끌고는 왔는데 스스로도 범인을 모르고, 어떻게 살인이 저질러졌는지도 모르는 작가. 독서 기계를 통해 읽지도 않고 평론을 써대는 평론가, 그리고 그 독서기계에 맞추어 소설을 쓰는 작가.

 

이런 걸 아마도 블랙 유머라고 할 거다. 웃어야 하는데 심각한 이야기이고, 심각한 이야기라는 게 분명한데도 ‘푸흡’하고 웃음이 나는... 그런데 그 대상을 다름 아닌 추리소설 작가, 출판사, 독자로 삼았다. 이 책과 연결된 모든 고리들을 비꼬고 풍자한 셈이다. 이토록 잔인한 풍자라니.

 

과장되어 있지만 현실을 비꼬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게 단지 추리소설가와 그 업계에만 한정되어 적용되는 얘기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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