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
말콤 글래드웰은 사례를 종합해서 하나의 통찰을 가져오는 것인지, 하나의 통찰적인 가설을 설정하고 그 가설을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찾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소개하는 사례는 그의 통찰과 매끄럽게 연결된다. 게다가 통찰은 기존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식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거나, 비틀거나, 혹은 심화시킨다. 그 동안의 『아웃라이어』(나는 이 책을 맨 먼저 읽었다), 『티핑 포인트』, 『블링크』, 『다윗과 골리앗』이 그랬다(『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는 좀 다른 류의 책이다. 그리고 좀 실망했던 책이기도 하다).
몇 년 만에 새로 내놓은 『타인의 해석』도 그렇다. 그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서로 관련성이 없어 보이면서도 결국은 연관되어 있으면서, 서로 독립적으로, 그리고 점층적으로 말콤 글래드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다.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타인을 해석할 때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것이다(이 책의 우리말 제목은 잘못 생각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타인의 해석’에서 주어는 명백하게 ‘타인’이지만, 이 책에서 ‘타인’은 명백하게 목적어다). 그가 제시하는 기본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가? 여기서 파생되는 질문은 우리가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와 같은 것들이다.
타인, 즉 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히틀러에 대한 영국 수상 체임벌린의 역사적 오해와 2015년 1월 텍사스주의 한 작은 도시에서 벌어진 샌드라 블랜드 사건(그녀는 사소하게도 차선 변경시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문을 받고, 체포되고, 결국은 자살했다), 2009년 전세계 금융 위기를 몰고 오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폰지 사기의 메이도프, 쿠바의 거물급 간첩 사건, 전혀 엉뚱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복역했던 아만나 녹스, 일산화탄소를 이용해 자살한 천재 시인 실비아 플라스와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보아도 거의 연관성이 없는 이 예들은 묘하게 우리가 타인과 접촉할 때 생기는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이런 예들을 통해, 혹은 그보다 더 풍부한 예와 연구를 통해 파악한 ‘우리가 타인을 해석하는 데 문제를 야기’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선, 타인은 정직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를 ‘진실기본값 이론’이다. 우리는 일단 타인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전제 속에서 그를 만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뭔가 의심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그가 하는 말이 정직한 거겠지, 하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진실기본값 이론’은 이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다. 서로서로 의심한다면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문명의 기둥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 진화적으로 성립된 우리의 전제는 타인을 잘못 해석하는 데 큰 요인이다(우리가 타인을 지금처럼 많이 만나고 해석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았던 인류의 진화 거의 대부분의 시기에서 ‘진실기본값 이론’은 너무나도 타당한 형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투명성’에 대한 맹신이다. 즉, 그 사람의 얼굴이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드라마나 면접이라는 게 그런 것을 전제로 한다. 드라마는 배우의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한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쁜 사람인지, 진실된 사람인지를 말을 하지 않더라도 시청자들은 쉽게 알아차린다(그리고 그것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 면접도 면접 대상자를 몇 분 정도 얘기하면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인지 알아낼 수 있다는 이론에 근거한다. 그러나 많은 사례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번째는 ‘결합’에 관한 것이다. 흔히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은 상황과 상관 없이 동일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특정한 행동은 특징 조건에서만 일어난다. 과도한 일반화는 타인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더라도 이를 철회하기가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녹록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된다. 잠깐 언급했듯이 이런 ‘이론’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고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특징을 진화시켜온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뿐이다. 타인을 접하는 경우가 흔해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타인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과 더 많이 접하고 있으며, 그런 경우 위의 생각은 그렇게 우리를 잘못된 경로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 바로 인정이다. 우리가 사람을 잘못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해석하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다. 몇 가지 단서만을 가지고 낯선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다면 분명 잘못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간단히 말해 “낯선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다.”는 말콤 글래드웰이 결론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며, 거기서 빠져나오는 길도 그렇게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