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를 적대시하는 여행자들조차도 본능적으로 나치 정권을 넘어서서 그들이 머릿속으로 진짜 독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찾아나선 듯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자 독일은 어떤 나라였을까? 독일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깜빡 속여 넘기고 도취시키는 힘을 여전히 갖고 있는 나라였다.” (453쪽)
역사를 다룬 책이 그 시기, 그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머물지 않고, 보편적인 인식과 반성으로 이어졌을 때 좋은 역사책이 된다. 줄리아 보이드의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가 바로 그런 좋은 역사 이야기다.
줄리아 보이드는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히틀러의 제3제국(1919년부터 1944년까지를 다루고 있으니 엄밀하게는 히틀러 집권 이전의 바이마르공화국 시절까지 포함하지만)을 여행했던 외국인들의 시각을 통해 독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패배에도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패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군부와 공산주의자, 유대인들의 배신으로 패전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전쟁 후 강요된 베르사이유 조약은 너무 가혹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너무 허약했다. 사회는 불안했다. 그런 사회의 불안을 업고 등장한 인물이 히틀러였다.
히틀러와 나치 이전에도 독일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굉장히 호감이 가는 여행지였다. 풍경은 아름다웠고, 거리는 깨끗했으며, 독일인들은 친절했다. 비용도 비싸지 않았으며 교육 수준도 높았다. 왕족에서 학자, 학생, 그리고 일반 여행객까지 많은 이들이 독일을 여행했다. 나치는 이 여행객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외국인들을 유혹했고, 국가사회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했다(옮긴이는 이를 ‘프로파간다’로 쓰고 있다. 단순한 ‘선전’과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많은 외국인들이 히틀러에 감탄하며, 그를 칭송했다(헨리 포드와 린드버그는 이미 그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밖에도 많은 유명인들 중에 친독일, 나아가 친나치가 적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은 의구심을 가지고 히틀러를 바라봤으며, 또 더 많은 사람은 별 생각 없이 독일 여행을 즐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일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독일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을 방문하고 난 후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친나치(친독)나 반나치(반독)이나 모두 독일 방문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나치는 이미 베르사이유 조약을 무력화시키며 타국에 대한 병합을 추진하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을 탄압하고, 반대자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때로는 그런 탄압을 감추기도 했지만, 노골적이어서 눈치채지 못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에 눈 감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나치와 히틀러의 정책을 찬성했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들이 나치의 치밀한 프로파간다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친절하면서 강인한 독일인들의 품성을 믿으며 독일이라는 국가, 나치라는 조직, 히틀러라는 인물도 그러하리라 믿은 여행객도 많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줄리아 보이드는 <들어가는 말>의 첫 장면에서 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독일 남부를 여행하는 영국 신혼부부 앞에 유대인 여인이 나타나 다리를 저는 딸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다. 줄리아 보이드는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히틀러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안다(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런 혹독하고 폭압적인 독일 사회를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 때 적국이었으며, 곧 벌어질 전쟁에서 다시 싸워야 했던) 영국인, 미국인 들이 그토록 많이 여행을 갔으며, 또 독일, 또는 히틀러를 찬양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나치의 프로파간다가 적극적이고, 교묘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전당대회에 참석하여 함께 열광하는 장면을 어이없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답을 알고 있는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저 그들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비판, 혹은 비난만 한다면 그 시대, 그곳에 존재했던 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도 그 시기에 그런 조건에 처했다면 별 다를 바 없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고, 그 시기로 갈 수 없다. 그러나 그 시기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비록 그들과 다른 판단을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내지는 당혹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위기감, 당혹감을 가졌다는 것이 조금은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일만은 아니다. 역사를 읽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