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의 사고 혁명. 첫 번째는 도구의 사용과 더불어 일어난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으로 인한 사고 혁명. 두 번째는 상징적 사고를 발견하고 이용하게 됨으로써 일어난 사고 혁명. 세 번째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서 비롯되었고, 최근까지 지속되어온 정보의 확산과 세계화로 인한 사고 혁명이다.
저자는 이 세 차례의 사고 혁명이 어떤 것인지를 현장 답사를 통해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야기한다(첫 번째의 사고 혁명은 인류가 최초로 도구를 사용한 흔적의 발굴 현장, 두 번째 사고 혁명은 인류가 최초로 남긴 동굴 그림 등). 하지만 저자의 목적은 우리가 어떤 것을 겪었는지를 알려주는 데 있지 않다. 그 사고 혁명에 내재되어 있는 창조적 사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첫 번째 사고 혁명에서는 석기를 만들어낸 대단한 인류가 중심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그들이 석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석기 도구를 매우 간단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직접 해보면 쉽지 않다. 다른 어떤 동물들도 그걸 이뤄내지 못했다. 사람이 가르치면 한두 개체는 성공하지만 그 기술은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인류는 성공해 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서로에게 배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발명을 모방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키워간 것, 바로 이것이 첫 번째 사고 혁명이다. 즉 창조적 사고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그럼 두 번째 사고 혁명, 즉 상징의 발명에서는 어떤 창조적 사고가 그 기능을 한 것일까? 저자는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인류가 단순히 과거로부터 전달되어온 지식을 습득하는 데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데는 없는 것을 채워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토대가 세워진 후에 가능해지는 것이고, 자유로운 사고도 논리적 이성과 결합했을 때 훌륭하게 작동하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세 번째 사고 혁명은 창조적 사고가 급격히 세계화이다. 이는 사고 혁명이 세계화로 이어졌고, 또 반대로 급격한 세계화가 사고 혁명으로 이어졌다. 즉 서로 어떤 먼저인지 알 수 없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하자마자 인류의 뇌는 급격하게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정보가 유통되면서 정보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따라서 새로운 사고도 더 빨리, 더 많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정보는 연구를 통한 창조적 사고가 가능해졌다. 즉, 가설을 선택하고 그 가설이 옳은지를 검증하는 과정을 줄여준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네 번째 사고 혁명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동안 인간의 이성이 담당해오던 과제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스스로 학습까지 하는 기계, 즉 컴퓨터, 혹은 인공지능으로 인한 사고 혁명이다. 그런데 이 사고 혁명은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분명 사고 혁명이라고 하면 인류의 사고 혁명을 의미할 터인데, 이 네 번째의 사고 혁명에서는 인간의 사고를 외주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사고 능력에 퇴화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즉 이 네 번째 사고 혁명은 우리에게 딜레마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도 그렇고, 독자도 혼란스럽다. 앞의 세 차례의 사고 혁명은 이미 과거의 일이라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아주 정돈된 견해를 가지고 쓰고 있다. 그에 반해 네 번째 사고 혁명에 관해서는 매우 혼란스럽단 느낌을 준다. 어떤 부분에서는 컴퓨터, 혹은 인공지능의 우수성, 즉 인간을 뛰어넘는 점을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좀 나아가면 그래도 인간의 창조성을 기계가 재현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또 기계의 창조성을 인정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 자체가 현재 네 번째 사고 혁명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