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영화를 보면, 복제인간이 등장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고, 폐기하고..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의 반려견들이 그렇습니다. 혈통 좋은 강아지를 돈을 목적으로 계속 생산해내고, 반대편에서는 쓸모없어진 유기견들을 안락사시키고 있으니까요. 외로움을 이유로 입양해서, 불편함을 이유로 버려집니다. 벌써 인간과 정을 붙이는 생명을 만들고 제거하는 상황이 SF영화처럼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모르는 척 하는 것이지요. 외면할수록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아래 첫 사진은, 수컷 진돗개 백설이의 사진입니다.
충성하던 반려견 백설이는, 주인의 사정으로 길에 버려졌어요. 이곳 시민 철수는 유기견 보호소에 신고를 합니다. 주인에게 돌려주려구요. 하지만, 철수의 예상은, 슬프게도 판단착오였어요. 보호소에서 안락사를 시킬거라나요.. 그렇게 버림받은 백설이처럼 유기견들은 자신의 주인이 타고 있던, 자동차라는 물체를 보면 쫓아다니고, 따라다닙니다. 주인이 나를 못 본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수의사인, “난 못죽여”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진료를 하지 않습니다. 그가 수의사로서 군복무를 할 때, 구제역 파동으로 돼지를 수백, 수천마리 도살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동물을 살려야 할 수의사가, 동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으니, 그 스트레스가 너무 컸답니다. 악몽에 시달릴 정도였다지요. 그 당시 담당자가 죽이려고 구덩이에 밀어넣는 새끼를, 밑에서 어미돼지는 살려내려고 얼굴로 밀어올리는 모습도 있었다지요. 그런 장면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후, 일부의 수의사가 하는 일을 보니, 자기가 보기에는 동물을 살리는 일을 한다기보다는, 일부 동물병원에서는 수익이 증가하는 쪽으로만 운영되는 면이 많아서 선뜻 일하러 나서지를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스스로 가만히, '나는 과연 수익을 바라보고만 진료하고 있지는 않은가?'하며 반성합니다.
착하고 선한 이 수의사는 진료 대신에, 지체장애인의 몸을 씻어주는 목욕봉사와, 진주시 유기견 보호소에서 강아지를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돌보는 피부건선이 심한 장애인을 위해 몇달간 기도를 열심히 해 주었는데, 많이 좋아졌다며 자기일처럼 기뻐하네요.
저는 김빼는 소리를 합니다.
“너의 기도 덕택이라는 증거가 어디있냐.. 암튼 잘했다.”
“형님, 유기견 보호소에 온 강아지들은 더럽고 피부병에 많이 걸려있어요. 보기 싫죠. 그래서 입양이 잘 안됩니다. 그나마 이쁜 놈들은 좀 되는데, 더럽고, 덩치크고, 병들고, 못생긴 놈들은 결국 남게되죠. 제가 사는 도시에서 최근 수년간은 안락사를 안하고 있지만, 보호소 들어온지 10일이 지나면, 소유권이 이전되어 안락사를 시킬 권한이 있어요.”
그 수의사 동생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여자분이 유기견 보호소에서 봉사를 하는 분이 있는데, 개를 사랑한답니다. 그래서 유기견보호소에 들어온 강아지를 입양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매달 유기견 치료비, 유기견 미용비 등으로 백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스스로 내서 치료해주고 돌보아주신다네요. 물론 돈이 많거나 경제적 여력이 있는 편이 아니랍니다. 역시 여기서도 어려운 사람이 더 많이 양보를 하는군요.
생각해보면, 유기 다람쥐, 유기 참새는 없습니다. 인간과 인연을 맺은, 고양이와 개만이 버려질 따름입니다. 부모자식도 버린다는, 비정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꼬리를 치며 정을 붙인 것에 대한 댓가는 ‘죽음’입니다. 차로 멀리 실어다가 내려두기도 하고, 짐승같은 어떤 주인은 달리는 차에서 그냥 창밖으로 반려견을 내던진다고도 하니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 인간을 증오하겠지요.
제가 어릴 적, 집 마당에서 개를 키웠습니다. 이름은 캐리, 메리 였지요. 어느 추운 겨울날, 캐리가 낮은 담을 뛰어넘다가 담장의 쇠창살 같은 곳에 몸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너무 춥고, 또 어떤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 캐리는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그 때 캐리를 들고 아버지께서 뛰어들어와 마루에서 석유난로를 켜서 몸을 녹여주고, 황급히 아버지께서 웃통을 벗어 본인의 체온으로 캐리의 몸을 비비고 흔들고, 따뜻한 물을 먹이고 했지만, 결국 캐리는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리려고 하던 과묵한 아버지 모습도 낯설었어요. 정든 대상이 죽는다는 것... 그래서 다시 개를 키우는 것이 무의식속에서 저는 두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버려진 유기견에게 안락사를 시키려 주사를 놓는 수의사분들도 가슴에 상처가 남습니다.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까요. 그저 30만원에 한 마리 반려견으로 키워 볼까나.. 했던 가벼운 마음이, 개에게도, 수의사선생님에게도 평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강아지를 내가 키운다는 권력. 강아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하나의 권력.
주인은 그 권력을 가지고 결국 개를 버렸습니다.
다른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고양신문 2014년 01월 22일자를 보면, 구산동 유기견 보호소의 유기견을, [작년에는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아는 현지 미국인이 개를 보내라며 비행기값까지 대가며 입양해 간 경우도 있었다.]는 글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인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에 신기하게까지 보이는 사건입니다. (유기견 문제는 한국만이 아닌,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서양에서는 부부가 이혼할 때에도 반려동물의 소유권을 가지고 싸울 정도로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생각한다지요.
내가 인간으로서 가진 알량한 권력을 가지고 나보다 못한 생명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나보다 더 많은 힘과 권력을 가진, 세상의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봅니다.
유기견. 버림받은 개. 유기치과의사. 버림받은 치과의사.
내가 병들고, 내가 말을 안듣고, 못생겨지고, 다른 사정이 생기면 나는 환자에게 버림 받을 수 있는 치과의사이겠지요. 버림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나는, 사람들은, 왜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좋아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태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버림받기 두려워하는 반려견처럼, 저도 환자분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할까.. 생각해봅니다. 또 어떻게 하면, 좀 더 성숙해져서, 나와 다른 타인과 자연들과 어우러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