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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Oct 21. 2024

의회경호담당관실 경위 김진영(35)의 이야기_2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니?"


어린이 박물관 안 실내 미끄럼틀에서 소리를 내며 즐겁게 노는 아진이를 보며 진영과 엄마는 나란히 앉았다.


"누굴 만나요. 나 연애 안 해요, 결혼도."

"해야지. 왜 안 해."

"여자라면 지겨워. 열심히 일하고 즐기다가 늙으면 연금 받아 넉넉히 살래."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자식은 있어야 해."

"자식 있잖아, 아진이."


진영이 정색하며 엄마를 보자 칠순의 노인은 그만 입을 꾹 닫고 말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진이는 분명 진영의 아이였다.






진영에게는 10년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독서실에서 만났고 같은 대학에 들어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비주얼 '캠퍼스 커플'이 되어 원 없이 사랑했고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둘은 막연히 언젠가 결혼을 할 것이라는 생각만 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동거를 시작하고 헤어지기까지 진영은 여자친구 없는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여자친구가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고 나서였다. 여자친구는 스튜어디스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아이를 지우겠다고 했다. 진영은 아이를 낳기만 하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생각은 달랐다. 둘이 말싸움을 하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번졌을 때는 이미 여자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때였다.



첫눈이 오던 12월 1일. 3.24kg의 건강한 여자아이가 지방의 한 작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곧바로 아빠 품에 안겼다. 엄마는 아직 꺼지지 않은 배를 쥐고는 모든 외부 연락을 다 끊어버렸다.

진영은 눈도 뜨지 못하는 핏덩이 같은 신생아를 안고 며칠을 울었다.


진영의 엄마는 엄마 잃은 손녀를 정성으로 보살폈다. 진영은 퇴근 길마다 발을 재촉해 아진을 안았고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였다. 밤새 우는 아이를 돌보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회의 시간에 꾸벅 자다 박 선배에게 여러 번 정강이가 까이긴 했지만 점점 살이 오르고 표정이 밝아지는 딸아이만 떠오르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제는 출생신고였다.

법에 따르면 진영은 아진이를 자신의 딸로 신고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법에 따르면 혼인이 아닌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의 출생신고는 엄마가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23년 헌법재판소가 가족관계등록법 제46조 제2항 등에 위헌 판별을 내리면서 아빠가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도록 바뀌긴 했지만, '친모의 성명,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 친모가 소재불명인 경우'로 제한을 해 한계가 있다.


진영은 국회에 연차를 내고 집 근처 주민센터를 찾았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었다. 내 딸을 아빠인 내가 내 밑으로 두겠다는데 왜 안돼? 진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민센터 직원은 진영의 사정을 듣더니 눈에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가능한 방법이 있긴 해요. 근데.."

"그죠? 방법이 있죠? 법이 이렇게 이상할 리 없잖아요. 제가 국회에서 일하는데 법이 이렇게 막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얼마나 많이 검토를 하고 토론을 하는데요."

"유전자 검사를 하셔야 해요. 검사해서 아이의 친부가 맞는 것이 확인이 되면 출생신고를 할 수 있어요."

"됐네, 됐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제가 병원을 알아봐야 하나. 유전자 검사는 어디서 하나요?"

"근데요 선생님. 아이는 미성년자라서 법정 대리인의 동의가 필요해요. 아이 엄마가 동의하지 않으면 검사 자체를 할 수가 없어요."

"아.... 연락 안 한지 한참 됐는데. 바뀐 연락처도 모르고. 해외에 취직이 된 건지 근황을 아는 사람도 없고요."

"엄마 가족은요?"

"몰라요."

"음.. 방법이 한 가지 더 있긴 해요. 친부 소송을 하세요. 그럼 검사가 가능해요."

"소송.. 이요?"


진영은 소송이라는 말에 입술을 깨물고 주민센터를 나왔다.

 

결과가 어찌 되더라도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아진의 엄마를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끊어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란, 나중에, 아진이 엄마와 아빠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을 때 같은 공간에서 서로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순간을 자주 갖는 것. 그런 것이었다.



"몇 년 후면 학교도 보내야 할 텐데 어쩔 셈이냐."


진영의 어머니가 아진이 잠든 틈을 타 진영에게 말했다.


"나도 고민 중이에요. 아이 생각하면 빨리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데.. 오늘 아진이 소아과도 못 갔죠."

"동네 의원 잘 아는 데니까 사정해서 해열제 하나 받아왔다만."

"... 죄송합니다."

"진영아, 엄마랑 아빠가 고민해봤는데, 아진이 형한테 보내자."

"예?"

"형 부부 몇 년째 아이 안 생겨서 마음 고생한 거 너도 잘 알잖니. 아진이 보내. 며칠 동안 깊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 방법이 최선인 듯싶다."

"그건 안 돼요 엄마."

"왜. 니 딸이니까 네가 키우겠다고? 그거 객기야. 젊은 놈이 일하기도 바쁘면서 애를 어떻게 키워. 난 아진이 봐줄 체력도 능력도 안된다. 형수, 며칠 전에 다녀가서 입양도 생각하고 있다더라. 아진이를 보는데 얼마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지.... 진수형 성격 잘 알잖니. 형수도 그 만한 사람 없고. 아진이가 가는 건 아진이한테도 형 부부한테도 좋은 일이다. 어른들만 눈 딱 감고 모른 척하면 돼. 네가 끼고 아진이 유령처럼 살게 할 셈이야? 욕심 버려. 남들은 해외입양도 보낸다는 데 곁에 두고 볼 수 있잖아. 좋게 생각해."



세상모르게 잠이 아진의 얼굴을 쓰다듬는 진영의 눈가 가득히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진영의 엄마는 마음 여리고 살가운 둘째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아진이는 국회 어린이 도서관에서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걸 좋아했다. 국회 캐릭터가 그려진 분홍색 카트를 타고 국회 한 바퀴를 돌 때는 신이 나 엉덩이를 들썩였다.


진영은 아진의 행동 하나하나, 표정 요리조리를 폰에 담고 또 담았다. 보면 볼수록 아진의 눈매가 진영 자신을 닮은 것 같다고 진영은 혼자 생각했다.


"우리 아진이 웃는 얼굴이 진수를 꼭 빼박았네."

"사람들이 아빠랑 나랑 쌍둥이 같대."

"사람들이 그랬죠요?"


진영은 엄마와 아진의 대화를 들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형을 닮았다는 소리가 마치 아진이가 사랑받고 있다는 소리처럼 들려 더욱더 좋았다.


아진아.

진영은 속으로 딸을 불렀다.

아빠는 네가 행복하면 됐어.

그걸로 됐어.






*사랑이법


지난 2013년 한 TV 프로그램에서 사랑이의 친모가 출산 직후 사라져 친부가 출생신고를 하지 못해 사랑이가 태어난 지 1년이 넘도록 의료보험과 보육비 지원 등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던 사연이 소개되었다.

이후 국회가 움직여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 개정안, 일명 사랑이법이 통과되었고 이듬해에 미혼부도 유전자 검사서 등을 제출하면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아 자녀의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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