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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Feb 13. 2019

"성의 변증법",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한줄요약 : 정말로 정반합의 구조는 어디서든 다 적용된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변증법은 너무나도 많은 곳에서 거론되고 있다. A의 이야기를 들어봤다면 B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는 게 변증법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정반합의 구조 속에서 객관적이고, 정확한 담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성을 통한 사유의 근본적인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정반합의 구조는 흔히 '역사 발전'에 적용된다. 너무나도 익숙한 '역사가 발전하고 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이전의 시대와 그에 반하는 시대를 통해서 극복된 시대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철학사에서는 대륙 이성론의 시대와 경험론의 시대의 대립 속에서 칸트의 사상이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역사는 남성의 시각에서 써진다. 쉽게 철학사만 들여다봐도 철학은 남성의 이야기지 최소한 여성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역사 발전은 남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지 여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프로이트 심리학 이후로 모든 인간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헤매고 있을 때 여성은 그런 콤플렉스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어스톤에 의하면 흔히 말하는 '좋은 여성'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남성의 단순한 발화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언어를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좋은-나쁜 여성을 구분하지 않아!"라고 한들 프로이트 심리학을 신봉하는 이상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역사 속에서 본다면 옛날이야기 일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은 담론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이에게 '감정적인 것'과 '성적인 것'을 곧 구별하라고 요구한다. 즉 그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적당한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적당한 반응이 아니라고 아버지는 생각한다.

만일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얻으려면 그는 그의 다른 느낌으로부터 성적인 것을 분리시켜야만 한다. 그러한 부자연스러운 심리적 이분법으로부터 직접 문화적으로 발달한 것은 문화를 병들게 한 좋은-나쁜 여성이라는 증후군이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중에서 - p.68


다시금 여성의 해방운동이 역사발전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여성의 억압을 당연시 여긴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역사의 흐름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서 제국주의적인 형태가 많이 나타났지만 파이어스톤에게 있어서 여성의 해방운동은 혁명의 성공성을 담지하는 것이다.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거부에 있다.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 모성애라던가 여성이 임신에 있어서 더 '자연적'이기 때문에 육아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 남성보다 육체적인 강인함이 없기 때문에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인간적'인 가치인 것은 아니다. 인류는 자연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차별적인 성적 계급제도의 유지를 자연 속에 그 기원이 있다는 근거로 정당화할 수 없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중에서 - p.21


여성은 역사 속에서 존재가 아닌 자로 규정되었다. 천부인권 사상이 누구에게나 해당하지 않느냐라고 답변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그 시대에는 인간을 대변하는 단어는 "man"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단어가 가지는 권력이, 언어가 어떤 권력에 봉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미셸 푸코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man으로 규정된 인간에는 최소한 여성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한다는 것은 가능한 한 동일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강요하는 전범에 따라 인식한다는 것이다. -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중에서 - p.142


따라서 파이어스톤은 여성이 더 이상 계급제도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나 페미니즘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2등 시민'이라던가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대상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 


여성이 대상이 아니라는 말은 결국 사랑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언젠가 들었던 "내가 너를 사랑해줄게"라고 말하는 게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글이 있었다. '사랑해준다'에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도 있겠지만 최소한 파이어스톤에게 있어서 여성은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단지 '사랑의' 대상이고, 그런 만큼 여성은 그들 자신을 성애적이라고 여긴다. 직접적 성의 쾌락을 남성에게만 보존시키는 기능은 여성의 의존성을 강화한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중에서 - p.153


남자아이가 자주적 주체로서의 페니스 속에 자기를 추구하는 데 반하여 여자 아이는 자기가 그와 같이 단장되어 귀염을 받고 싶다고 공상하는 그대로 인형을 꾸며 귀여워 해준다. 더 나아가 그녀는 자기 자신을 신기한 인형으로 생각한다. 칭찬과 꾸중을 통하여 시각과 말을 통하여 여자는 "예쁘다" "밉다"는 말의 뜻을 발견한다. 이윽고 그녀는 귀염을 받기 위해서는 "그림처럼 예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 폭의 그림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 시몬 드 보부야르, "제2의 성" 중에서 - p.406


여성은 인형이 아닐뿐더러, 더욱이 사랑의 대상도 아니다. 이렇게 내가 너를 사랑해준다는 말에는 자연스럽게 대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그 말에는 무의식적인 권력구조가 담겨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에게 있어서 권력주의적 사랑이 건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는 말을 빌어 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말속에서 나타나는 권력구조에 대해 인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평점 : ★★★ (역사 발전에 대해선 회의적이기에 다소 안타까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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